전시장에 검은 밤, 달빛과 물안개에 젖은 왕버들나무의 신비로운 모습이 압도적인 크기로 표현돼 있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 문명으로 인해 깜깜함이 사라진 시대, 이처럼 달빛의 고요와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전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중견 이재삼(64) 작가가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하는 개인전 ‘달빛 녹취록’이다. 작가는 목탄을 물감처럼 써서 빛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달빛의 속성을 표현한다. 그는 소묘나 밑그림에 사용되는 재료로 치부되던 목탄을 주재료로 삼는 회화적 실험을 1998년부터 해오며 ‘밤의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초등학생 때 외갓집이 있는 영월에 산 적이 있다. 부모님은 농사철이면 초등학생인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땐 버스가 없으니 10리, 20리를 걸어 다녔다. 일을 마치고 깜깜한 밤, 달밤을 걷기도 했다. 제 어린 시절 그 기억, 그것이 튀어나왔다.”
작가는 그 유년 시절 깜깜한 밤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고 그 수단으로 목탄을 택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목탄을 여러 겹으로 쌓고, 문지르는 등 목탄의 농도를 조절해 다양한 검은 색조를 만들어냈고, 이는 단색 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작가는 목탄에 대해 “나무는 목탄의 근원이고, 목탄은 나무의 변형된 형상이며, 숲의 육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숲의 영혼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나무는 소멸과 재생의 과정을 거쳐 목탄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 목탄은 다시 나무의 형상으로 되돌아간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목탄이라는 친환경적 재료의 본질과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생성과 소멸, 생명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환적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생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다.
전시는 ‘수중월(水中月)’, ‘심중월(心中月)’, ‘검묵의 탄생’ 등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된다. 각 섹션은 달빛이 머무는 물, 달빛이 비추는 내면, 목탄을 통해 구현된 검은색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검묵의 탄생’은 아카이브처럼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제작된 목탄화, 인물화,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가의 초기 작업과 예술적 뿌리를 조명한다. 4월 20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