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극우의 언어 납치

입력 2025-02-25 00:33

2017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는 30대 남성이 10대들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자신을 말리던 승객 2명을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백인 극우주의자였던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표현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언어로 공격할 자유가 아니다. 백인 남성이 무슬림과 흑인 소녀에게 “내 나라에서 꺼져” “죽어버려”라고 외칠 수 있는 혐오의 자유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사실이, 민주주의 안에서 자라난 극우 파시스트가 민주주의 언어를 훔치는 걸 막지는 못했다.

불행하게도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거리의 극우 세력이 주류 정치권의 손을 잡고 양지에서 활개친 지난 몇 주 동안 우리 사회에선 극우의 단어 납치로 불릴 일들이 횡행했다. 극우 시위대가 ‘시민 저항권’을 들먹이며 법원을 공격하고, 집권여당 지도부가 ‘경찰의 과잉 대응’과 ‘인권 침해’를 운운하며 폭력을 비호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방어권 보장’과 ‘권리 보호’를 부르짖으며 내란죄 피의자들을 옹호했다. 심지어 “헌법재판소를 두들겨 부수자”는 인권위 상임위원과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친북 종북 좌파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자”로 낙인 찍은 여당 국회의원이 내세운 명분조차 아름다웠다. 헌재의 ‘공정한 재판’과 대통령 ‘인권 보호’ 같은 것들이다. 헌법기관을 향한 모욕과 욕설, 협박 위로 공정, 정의, 법치의 깃발이 펄럭이는 형국이다.

폭력 선동과 민주주의적 언어의 기묘한 조합은 공론장에 있는 다수를 혼란에 빠뜨렸다.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민주주의 언어에 반대하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 방어권을 보장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겠는가. 누구도 수사와 재판에서 적법 절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법원을 공격한 폭도에게도 인권은 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재확인하는 일이 의미를 가지려면 한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논의의 모든 참가자들이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참가자 모두가 민주주의자들이어야 앞서 확인한 민주주의의 공리는 공론장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곤경은 이 전제가 붕괴됐을 때 민주주의에 닥칠 위기를 보여준다. 참가자 일부가 체제 밖에 존재할 때, 혹은 체제 안팎을 넘나들며 폭력과 전복을 꿈꿀 때 민주주의는 속수무책이 된다.

극우가 유도한 언어의 오염은 공론장의 잘못된 논의로 이어졌다. 그게 나의 관찰이다. 체제 밖에서 체제를 공격하기 위해 차용한 언어와 체제 안의 언어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건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절차적 흠결과 민주주의 가치의 훼손을 동일선상에 놓고 똑같은 무게로 비판하는 건 온당한 일이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립을 내걸었으되 결과적으로는 극우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 그들의 주장을 증폭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사회적 신뢰가 무너졌을 때 그 후과는 모두를 덮치게 된다. 당신과 나를 포함해 모두에게 공평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은, 민주주의가 가장 최악의 적들에게 자신을 파괴하는 수단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우리와 그들의 정치-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각색 인용) 오래 전 독일 나치 선전부장은 민주주의의 우둔함을 조롱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발언은 먼 나라 대한민국에서 극우와 씨름하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반칙하는 상대를 규칙으로 이길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언어가 극우의 손에서 민주주의 파괴의 무기가 되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까. 나는 답을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믿어보려고 한다. 언제나 조용히 자리를 지켜온 다수의 힘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