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긍휼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시대, 사랑할 수 없는 시대, 감사함과 배려가 없고 태도와 자세가 불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더 슬프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힘들을 잃어버렸고 감사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기 어려워졌으며, 기다려 주기보다는 빠른 판단과 빠른 비판이 먼저인 시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 또한 긍휼을 상실한 시대였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지금보다 심각했으며 사랑도 배려도 감사도 사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고단했기 때문이며 행복은 나의 일이 아니고, 내 주변 모든 사람이 고단한 오늘을 겨우겨우 살아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와 상관없는 긍휼이라는 단어를 꺼내시니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헛된 믿음을 주는 땅에서 늘 좌절했고 쓸모가 없어져 용도폐기 된 경험은 긍휼을 알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내일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긍휼이라니. 군중 속에 있던 사람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는 선지자다, 선생이다, 예언자다 하며 말하기에 따라와 봤는데 뻔한 얘기만 하네. 행복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게 아닌가. 잘못 온 것 같아. 일어나야겠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의 눈빛과 목소리, 표정과 호흡이 보입니다. ‘어라? 이건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따뜻함이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내 속에 들어와 딱딱하게 굳은 내 마음에 문을 두드리며 이야기하고 있어. 자비 긍휼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그분의 시선, 목소리, 나를 향한 눈 맞춤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 속 한 사람, 한 사람을 행복으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이라는 책에서 “긍휼은 예수님의 방향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긍휼은 단지 공감하는 마음, 이해하는 태도, 동정하는 행동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향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하향성의 삶을 사신 예수님,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신 예수님, 우리 인생에서 매 순간 함께하신 예수님의 방향으로 사는 것이 긍휼의 삶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향성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흔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를 돌봐 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수가라는 마을에 사는 여인을 만나고자 유대 내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땅으로 향하신 걸음으로,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으로, 귀신 들린 딸을 치료해달라고 고함친 가나안 여인을 돌아보신 예수님으로, 뇌전증에 걸린 아들을 치유해달라고 외친 목소리에 반응하신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긍휼로 살아가는 것은 낮은 곳으로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안아 주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으로 만져 주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 주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긍휼을 상실한 시대, 자비가 사라진 시대, 예수님과 같이 사랑의 눈빛, 사랑의 목소리, 사랑의 태도로 누군가를 안을 때 그 깊이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자비까지 체험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최재영 목사(라이트하우스 파주)
◇라이트하우스 파주는 개척 2년여를 맞은 신생 교회입니다. 체계적인 조직과 풍성한 자원, 일사불란한 행정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