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에서 각종 갈등을 유발하는 질문 중 하나는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해’일 것이다. 자기 위주로만 상황을 해석하는 이 질문에 사로잡히면 문제 해결은 난망해 진다. 도은미(65) 레헴가정생활연구소장은 갈등 상황에서 문제 해결보다 ‘상한 감정’에 주목하는 가정사역자다. 대다수 가족·부부 간 갈등의 핵심엔 상한 감정이 있으며 이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관계뿐 아니라 그간 지켜온 신앙도 무너진다는 이유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가정 치료학’ ‘결혼과 가정’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은 도 소장은 한국교회 대표적 가정 사역 중 하나인 두란노 아버지학교를 1995년 남편과 공동 창안한 장본인이다. ‘사연으로 움직이는 가정’ ‘대화학교’ 등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최근 7년 만의 신작 ‘상한 감정 버리기’(규장)로 돌아온 그를 경기도 광주의 자택에서 만났다.
상한 감정의 빚을 청산하라
도 소장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상한 감정으로 오랜 시간 마음 앓이를 했다. 15세 때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난 그는 까다로운 맏언니와 ‘귀한 아들’인 두 남동생 대신 허드렛일을 하며 학교도 못 간 채 5년간 집에서 기계 자수를 놓았다. 그는 가족 생계에 직결되는 이 일에 하루 16시간씩 매달렸다. 경제적 상황은 점차 나아졌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 지친 몸을 부여잡고 일하면서도 부모에게 “수고했다”나 “고맙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원치 않던 둘째 딸’이자 ‘성실한 무수리’로 여기는 부모의 대응은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 감정의 영향력은 도 소장이 야간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1982년 목회자 남편과 결혼 후 브라질 상파울루 동양선교교회를 섬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감정을 떨친 건 그가 ‘상한 감정 계산하기’를 한 이후부터다. 상한 감정 계산하기는 상처를 마이너스(빚)로, 긍정적 경험(수익)을 플러스로 수치화해 셈하는 것이다.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긍정적 경험과 감정이 모이면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원리다.
폭언을 일삼은 어머니와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가 복음을 접하고 회심하는 과정에서 도 소장은 ‘두 분께 상처만 받은 건 아니다. 덕분에 끈기와 인내심을 길렀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이 경험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있더라도 상한 마음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며 “받은 복과 은혜를 떠올리며 상대를 향한 상처와 긍정적 경험을 헤아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상한 감정에 회복 아닌 죽음을
두란노 아버지학교는 아버지와의 상한 감정을 해결한 후 나온 프로그램이다. 미국 ‘프로미스 키퍼 운동’에 착안한 이 학교는 훗날 국내외 교계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외 한인 목회자를 대상으로 2년간 사역 경험 기회를 주는 ‘온누리교회 CD 사역’ 중 해당 프로그램을 도입한 부부는 임기를 마치면서 이후 사역을 교회에 일임하고 다시 브라질 모교회로 돌아왔다.
이후 10년간 한 해의 절반을 해외 한인교회를 찾아다니며 가정 사역의 중요성을 알려온 도 소장에게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왔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뼈가 면도날에 베이는 듯한 아픔으로 강연과 집필 활동을 10여년 간 멈추면서 다시 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하던 사역도 멈춰 세우고 치료도 않는 하나님께 감정이 격해져 기도하던 중 한 음성을 듣는다. “상한 감정은 치유하는 게 아니라 죽여야 한다.” 과거의 상처로 억울하고 아픈 ‘옛사람’은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살라는 부르심이었다.
힘들 땐 마음과 거리를 두라
도 소장은 이런 감정 분리가 갈등·문제 해결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마음이 아플 땐 오히려 마음에 집중하면 안 된다. 상한 감정에서 나오는 언어로는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며 “상한 감정을 다스린 뒤 문제에 접근하라”고 조언했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문제 공책’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했다. 도 소장은 “상한 감정이 올라오면 공책에 문제 상황을 적어보라”며 “감사 거리를 떠올리는 등 감정을 진정시킨 뒤 다시 노트를 펼치면 해결법이 더욱더 명확히 떠오른다”고 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조기 은퇴한 남편과 함께 2017년 한국에 들어온 그는 5년 전 레헴가정생활연구소를 열었다. 건강한 가족 관계를 위해 설립된 연구소는 ‘가정해부학’ 등의 24개 과목을 2년간 수료해 배출하는 ‘대화 사역자’를 양성 중이다. 손자녀를 둔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아보트 학교’도 10회째 순항 중이다. 도 소장은 “히브리어로 아보트는 ‘선조’를 의미한다. 자손이란 의미를 지닌 ‘벤’을 학교명에 넣은 자녀 세대용 ‘벤 학교’도 준비 중”이라며 “앞으로도 생애주기 가운데 건강한 가정의 사명을 일깨우는 사역 개발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