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을 상영하는 국가마다 관객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스트레스를 영화에 투사하는 듯했다. 독재자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은 좋지 않은 정치 리더의 여러 교집합을,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요즘 힘든 청년 세대 모습을 보여준다. 나라별로 관객들의 반응이 달랐던 게 아니라 어디서나 비슷한 반응이었다.” 영화 ‘미키 17’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은 지난 19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해외 관객들의 반응을 이같이 전했다. 영화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처음 공개된 데 이어 15일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국내 개봉은 오는 28일이다.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 ‘미키 17’은 삶이 궁지에 몰린 주인공 미키가 니플하임 행성으로 떠나 소모품인 ‘익스펜더블’로 살아가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미키는 위험한 실험에 투입되고, 죽으면 ‘휴먼 프린터’를 통해 복제돼 살아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기생충’(2019) 이후 5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봉 감독은 “영화에서 미키가 그렇게 여러 번 죽어도 죽을 때마다 무섭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개봉을 앞둔 심정도 비슷하다. ‘옥자’가 봉 6, ‘기생충’이 봉 7, 지금이 봉 8”이라며 웃었다.
그는 이번 작품에 대해 “SF장르이면서 근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드라마다. 미키라는 청년은 불쌍하기도, 웃기기도 하고 허술한 데가 많은 친구인데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남아 보려 발버둥 친다”며 “그러다보니 미키와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가 영화 속에서 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힘없는 노동자 미키와 대척점에서 자본주의와 비인간성, 차별주의를 대변하는 니플하임의 독재자 케네스와 아내 일파(토니 콜렛)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여러 정치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봉 감독은 “독재자 캐릭터를 구상하고 캐스팅을 생각하다가 러팔로가 떠올랐는데 재미있었다. 실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러팔로가 본인이 가장 증오하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라며 “시나리오를 보내고 처음 줌으로 회의를 했는데 ‘봉, 와이 미(Why me?)’라고 하면서 난감해하더라. 정말 귀여웠다”고 돌이켰다.
이어 “현장에서 우리가 겪었던 정치적인 악몽, 미국과 한국의 실존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며 “독재는 무섭지만 우스꽝스러운 구석도 있기에 블랙코미디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마샬의 모티브에 대해 국내에서도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는 것을 의식한 듯 “시나리오는 2021년에 완성해서 제작사인 플랜 비와 워너브러더스에 줬다. 이건 증거로 채택될 만한 정확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미키 17’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걸음을 떼는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꽉 닫힌 ‘해피엔딩’을 택했다. 봉 감독은 “‘진짜 원하던 엔딩은 그게(해피엔딩이) 아니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해피엔딩 하면 안 되냐”며 웃었다.
그는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불쌍하기도 측은하기도 한, 아들 같은 미키가 가혹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결국은 파괴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간 내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가혹했다는 약간의 반성도 있었다. ‘한 번쯤은 덜 가혹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미키가 당하는 일들 역시 하도 가혹해서 이런 말은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봉 감독의 영화엔 계급이라는 키워드가 녹아있고, ‘질서’와 같은 대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마샬이 미키에게 경멸과 혐오의 말들을 퍼부으며 사람 취급을 안 해주는데 미키 자신조차 그런 생각에 물들어 있었다”며 “그랬던 미키가 굴레를 벗어나 자존감을 찾는다. 휴먼 프린터도, 죽은 미키를 던져버리는 거대한 소각로 ‘사이클러’도 원형인데 마지막에 그 쳇바퀴를 폭파시켜버린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영화의 제목이 왜 원작 ‘미키 7’에서 ‘미키 17’로 바뀌었는지를 말해준다. 영화 제목은 처음에 ‘미키 17’로 나타났다가 숫자가 18로 바뀌고, 영화가 끝날 땐 ‘미키 반스’(미키의 본명)로 또 한 번 바뀐다. 봉 감독은 “미키 17에서 18로 변하는 숫자는 성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인물들이 의도적으로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에 집중돼 있다. 미키와 나샤가 대표하는 젊은 세대가 행성에 가서 (마샬의 표현에 따르면) ‘번식’을 하도록 한다”며 “거의 유일하게 부모 세대로 나오는 게 마샬 커플인데 그들은 최악의 인간이다. 그들이 장렬하게 퇴장당하고 나서 나샤가 연단에 선다.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바 즉, ‘퇴장하려면 곱게 퇴장해야 한다, 곱게 늙어야 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외계 행성의 크리처인 ‘크리퍼’의 디자인은 ‘괴물’(2006)과 ‘옥자’(2017) 작업을 함께 한 장희철 디자이너가 맡았다. 봉 감독은 “크루아상 모양에서 착안해 공격받으면 몸이 동그래지는 동물 아르마딜로까지 생각이 이어졌다”면서 “설원 위에서 크리퍼들이 몰려가는 장면은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버팔로들이 몰려가며 지축을 흔드는 소리를 내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들어갔음에도 영화는 봉준호만의 느낌을 잃지 않았다. 개봉이 애초 계획보다 늦어지는 것을 두고 워너브러더스 측과 갈등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종종 나왔다.
봉 감독은 “처음 설정된 순제작비 예산 1억2000만 달러(약 1730억원) 안에서 일정을 잘 맞춰서 끝냈다. 작은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제작비가 3억 달러까지 간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규모는 아니다”라며 “내가 어떤 감독인지 그쪽에서도 뻔히 안다. ‘원래 이상한 영화 찍었는데 할리우드 영화 찍는다고 갑자기 개과천선하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저 녀석 쇠고집 못 꺾는다’고 이미 ‘설국열차’(2013) 때 소문이 났고, 디렉터스 파이널 컷(감독의 최종 편집본)을 조건으로 계약했다. 의견 제시는 있었지만 편집에 대해 강요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미키 17’에는 봉 감독 영화 최초로 로맨스 요소가 들어갔다. 그는 “정통 멜로 영화도 언젠가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이번엔 로맨스를 새로 도전했다기보단 원작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를 살려 좋은 남녀 배우의 조합으로 잘 찍고 싶은 욕심이었다”며 “‘휴먼 프린터니, 우주 원정이니 해도 결국 이거(사랑)’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나샤는 미키의 옆에 있는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미키를 보호하고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