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뭄·냉해… 산지 초토화… 식품 원자재값 해마다 치솟아

입력 2025-02-20 18:58

올해도 ‘기후플레이션’이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불안 요소로 떠올랐다. 기후위기에 따른 물가 상승을 뜻하는 기후플레이션이 몇 년째 계속되면서 사실상 ‘뉴 노멀’로 자리 잡았다. 폭염·폭우·냉해·가뭄이 예측 불가능하게 펼쳐지며 신선식품 가격을 끌어올리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기후 현상은 수입 원재료 상승으로 이어져 가공식품 가격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른바 기후플레이션 시대다.

기후위기는 전방위적으로 ‘한국인의 식탁’을 위협한다. 2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후플레이션은 간접경로(국제 곡물 및 원자재 가격 상승이 국내 물가에 반영되는 과정)와 직접경로(국내 기후변화가 농산물 생산에 직접 영향을 미쳐 가격을 상승)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이미 몇 년 동안 기후 변화에 따른 가격 인상을 겪어 왔다.

간접경로의 영향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로도 짐작할 수 있다. FAO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세계식량가격지수가 127.5로 1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127.0)과 지난달(124.9) 2개월 연속 하락세지만 언제든 다시 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이 영향의 직격탄을 받는다. 대부분 가공식품이 수입 원재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 남북미를 가리지 않고 곡물과 원자재 생산지에서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가 심화되면서 주요 식료품 원재료 가격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코코아와 커피 가격은 지난 1년 동안 역대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커피 가격 상승의 주요 배경은 엘니뇨 현상이다. 엘니뇨는 열대 동태평양 수온이 평년보다 상승하는 현상이다.

한국의 기후변화인 직접경로는 무엇보다 폭염 영향이 크다. 한국은행은 폭염으로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농산물 가격 상승률이 0.4~0.5% 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한다. 지속적인 기후 대응 전략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식량 안보와 경제 안정성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후플레이션에 대한 대응 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안진호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극한 기상 현상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 교수는 “연평균 기온 상승만큼이나 극단적인 기상 이변이 위험한 상황이다. 아주 짧은 집중호우와 폭설은 물론 메가드라우트 같은 장기 가뭄도 빈번해지고 있다”며 “농작물이 이를 견디지 못하면 사회적 문제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기후플레이션 영향으로 가공식품 가격 인상과 신선식품 고공행진이 연초부터 줄을 잇고 있다. 2개월도 지나지 않는 동안 10여 기업이 제품 가격을 올렸다. 스타트를 끊은 건 커피와 초콜릿이었다. 식품업계에서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최근 몇 년간 가격을 계속 올렸던 터라 부담이 되지만 도미노 가격 인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올해도 기후플레이션 영향에 따른 원재료 상승 압박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커피와 초콜릿 제품부터 인상된 것은 커피 원두와 코코아 원재료 가격 상승세가 거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엘니뇨 현상에 따라 미국 남부와 멕시코에는 폭우가, 아시아와 북미에는 가뭄이 발생한다.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인 브라질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며 아라비카 커피 가격이 1977년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미국 뉴욕 ICE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아라비카 커피 선물 가격은 2023년 2월 186센트에서 올해 2월 422센트로 126.88% 증가했다. 저가 커피나 인스턴트 커피에 사용되는 로부스타 커피는 베트남에 폭우가 쏟아지며 작황이 나빠졌다.

코코아 가격도 마찬가지다. 뉴욕 ICE선물거래소 기준 코코아 t당 가격은 2023년 3월 2656달러에서 최근 1만159달러로 382% 급등했다. 비영리 연구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이 세계 4대 카카오 생산지(카메룬·코트디부아르·가나·나이지리아)의 44개 카카오 재배 지역을 조사한 결과, 3분의 2에서 연간 이상고온 기간이 6주 이상 증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사치품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도 내놓는다. 두 품목 모두 해외 원재료 의존도가 매우 높아 국내 물가 불안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글로벌 커피 무역 거래를 하는 스위스 기반 볼카페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5~2026년 브라질의 아라비카 커피 60㎏짜리 자루 생산량 전망치를 지난 9월보다 1100만 포대 줄어든 3400만 포대로 하향 조정했다. BBC에 따르면 세계 최대 커피제품 생산업체 네슬레의 고위 임원은 "원두 가격 상승을 이유로 커피 가격 인상과 포장 용량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동서식품은 원가 절감을 위해 마케팅 비용 축소와 긴축 경영을 검토 중이다. 지난해 원두 가격을 기준으로 수립했던 경영 계획도 재조정하고 있다.

가격 인상 대신 '슈링크플레이션'(가격을 유지하면서 제품의 크기나 양을 줄여 판매하는 방식)이나 '스킴플레이션'(가격은 그대로 두고 품질이나 서비스 수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처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원가 절감을 위해 제품 크기를 줄이거나, 코코아 함량을 낮추는 대신 합성 초콜릿 같은 대체재를 도입하는 식으로 제품의 품질을 낮출 수도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은 유지류에서도 두드러진다. 팜유는 과자, 초콜릿, 치킨, 버거, 라면, 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에 쓰인다. 한국의 유지류 수입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라면 업체들도 상당한 가격 인상 압박을 받을 수 있다. 팜유 가격 상승은 치킨업계에도 치명적이다. 지난해 굽네·파파이스 등 일부 치킨 브랜드가 가격을 인상한 것도 유지류 가격 영향을 받은 탓이다. BBQ는 2023년 10월부터 올리브유와 해바라기유를 혼합 사용하다가 8개월 만인 지난해 6월 치킨 메뉴 23개 가격을 평균 6.3% 올렸다.

가뭄과 전쟁이 겹친 곡물 시장도 불안정하다. 하반기 엘니뇨가 가고 라니냐가 오면 통상 곡물 가격이 강세를 보인다. 라니냐는 북미에 강추위, 남미에 가뭄을 유발한다. 이에 따라 소프트(커피·코코아 등) 가격은 하락하더라도 옥수수·대두·밀 가격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로 농·수산물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지난해 봄철 서리 피해로 인한 사과·배 가격 급등부터 여름 폭염으로 인한 '금배추' 사태, 겨울철 한파와 대설로 인한 감귤·딸기 가격 상승까지 계절별 악천후가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은 2025년 1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발표하며 무(79.5%)와 배추(66.8%) 등 농산물 가격의 상승폭이 컸다고 전했다. 김 가격은 35.4% 상승해 1987년 11월 이후 37년2개월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배추 가격 상승률도 2022년 10월 이후 최고 수준으로, 이상기후로 인해 산지 출하량이 줄어든 것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폭염과 홍수 등 이상기후로 인해 과일 재배지 변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현재의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70년에는 강원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24년 1~3월 한국의 과일 물가 상승률(36.9%)은 대만(14.7%), 이탈리아(11.0%), 일본(9.6%)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더해 연초부터 치솟는 물가에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불가피하다. 생계비 부담이 큰 취약계층은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며 "유통업계의 할인 경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가격 상승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