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미국의 배신, 약육강식의 세계 열었다

입력 2025-02-21 00:50

지난 3년 우크라이나 도운 美
하루아침에 러시아 손잡으며
영웅이라 칭송하던 젤렌스키
'독재자'로 몰아 내치고 있다

돈과 힘의 논리 앞세운 트럼프
약육강식 세계 질서 만드는 중
그 험난한 파도로부터
한반도 역시 자유롭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풍부한 자원을 언급하며 “그린란드를 사라”고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화장품 재벌 에스티 로더의 상속자 로널드 로더였다. 첫 임기 때 대학 친구인 로더에게 이 얘기를 들은 트럼프는 백악관에 그린란드 인수팀을 꾸리고 이를 공론화했다. 다시 대통령이 돼서 이번엔 우크라이나 희토류를 갖겠다고 나선 배경에도 로더가 있었다. 그는 2023년부터 희토류 개발 컨소시엄에 투자자로 참여해 전쟁 중인 키이우를 오가며 타진해 왔다.

로더와 만나 팁을 얻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방미 때 트럼프를 대면했다.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하며 늘 그랬듯이 민주주의 수호를 호소한 그는 대선 후보 트럼프와 만나서는 희토류 얘기를 꺼냈다. 만약 그가 당선돼도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케 할 당근을 주려고. 벤처기업이 투자자에게 프레젠테이션하는 듯했다는 그 회동은 가치를 공유하던 두 나라의 동맹 관계가 상업적 거래 관계로 바뀌는 장면이 됐다.

돈을 줘서라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나라를 지키려던 젤렌스키에게 트럼프는 지난 12일 베센트 재무장관을 보냈다.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0분의 긴 통화를 한 그날, 베센트가 젤렌스키에게 들이민 ‘재건투자협정’ 문안은 경제적 식민조약에 가까웠다. 미국의 지원액보다 훨씬 많은 5000억 달러(720조원)를 내놓으라며 희토류에 석유·가스까지 50% 지분을 요구했고, 우크라이나 주권과 국제법은 철저히 무시한 이행 절차가 명시돼 있었다. 절박한 안보 조치는 언급도 없이 ‘우리 돈부터 갚고 남는 걸로 재건하라’는 식의 협정을 젤렌스키는 거부했다.

트럼프와 푸틴의 통화 사실이 공개되자 모스크바의 한 일간지에 둘의 대화를 반농담조로 이렇게 추측한 글이 실렸다. “이봐, 블라디미르. 나도 큰 나라를 가졌고 너도 큰 나라를 가졌는데, 우리가 세계를 나눠먹으면 어때?”(트럼프) “야,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야.”(푸틴) 장난스러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듯, 지난 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종전협상은 트럼프의 협정안을 거절한 우크라이나, 미국의 동맹이자 이해관계자인 유럽을 모두 배제한 채 미·러 단독으로 진행됐다.

양자회담의 판이 깔리자 러시아에선 “트럼프가 많은 것을 양보할 듯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양보하면 되는 거니까. 이렇게 유리한 구도에 쐐기를 박듯 푸틴도 돈을 제시했다. 러시아 협상단은 미국 측에 ‘총액 3240억 달러(466조원)’가 적힌 문서를 건넸다. 개전 후 러시아에서 철수한 미국 기업들의 손해액을 추산한 이 수치는 푸틴이 트럼프에게 ‘나랑 다시 친해지면 이렇게 큰돈을 벌 수 있어’ 하고 속삭이는 말이었다.

사우디 회담 후 모스크바 정가의 표정을 BBC는 “축제 분위기”라고 전했다. 러시아가 내준 것은 “전쟁을 끝내자”는 말에 동의한 것뿐인데, 외교관계 복원, 경제제재 해제, 국제무대 협력까지 그간의 ‘왕따 전범’ 신세를 일거에 뒤집는 합의를 얻었다. 이후 트럼프가 쏟아낸 말은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전쟁을 젤렌스키가 일으킨 양 그에게 책임을 돌렸고, 전쟁 중이라 못한 선거를 문제 삼아 대통령 자격 시비를 걸더니, 급기야 “독재자”라 부르며 “나라를 잃게 될 것”이란 극언까지 했다.

종전협상은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 편에 섰던 미국이 한순간에 러시아 편으로 갈아타는 자리였다. 러시아의 침공 징후를 경고하며 막아섰던 미국, 강행하자 세계를 규합해 함께 맞섰던 미국, 나라를 지키려는 약소국 지도자를 의사당에 초청해 기립박수를 보냈던 미국은 이제 없다. 바이든이 영웅이라 불렀던 젤렌스키를 트럼프는 하루아침에 독재자로 몰아 내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가장 의지했던 우방에게 아주 지독한 배신을 당했다.

지난주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문제와 나토 동맹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었던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연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관세로 경제를 흔들더니 안보마저 발을 빼는 미국의 모습에 지금 자구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우크라이나를 배신하고 유럽에 등을 돌리는 트럼프는 오직 힘과 돈이 작용하는 세계, 힘이 세면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괜찮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만들고 있다. 그 파도가 한반도에 미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