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예제와 노예무역 폐지법 제정에 앞장선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는 정계에 진출했거나 이를 꿈꾸는 기독교인이 롤모델로 손꼽는 인물이다. 무려 46년간 이 운동에 투신한 윌버포스는 악습 철폐를 넘어 당대 영국인의 가치관을 뒤바꾼 뚝심의 정치인이다. 이름과 성과는 널리 알려졌지만 순탄치 않던 그의 정치 역정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윌버포스는 어떻게 ‘기독 정치인의 표상’이 됐을까. 최근 ‘윌버포스’(홍성사)를 펴낸 윤영휘(48) 경북대 사학과 교수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나 그 이유를 들었다.
연세대와 서울대를 거쳐 영국 워릭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윤 교수는 ‘기독교 정치’와 ‘노예무역’ 분야를 집중 연구한 서양사학자다. 케임브리지대 클레어 홀 종신회원으로 최근엔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영국사를 강의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책 출간 배경이 궁금하다.
“대학원 때부터 윌버포스를 연구한 학자로서 그의 일기와 서신, 의사록 등 1차 사료를 충실히 반영한 새로운 전기를 쓰는 게 숙원이었다. 이전 전기와 이 책이 다른 점은 일대기뿐 아니라 당대 영국 사회의 현실과 국제 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조명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윌버포스를 위시한 기독 정치가들이 주도한 도덕성 개혁 운동이 어떻게 한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꿨는지에 주안점을 뒀다.”
-여타 정치인과 차별화된 윌버포스만의 특징이 있다면.
“윌버포스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영 제국에서 복음주의 가치관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 정치가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비기독교적 언어로 설명하는 데 능한 ‘세상 속 그리스도인’이기도 하다. 성경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여러 집단에서 나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파성을 지양한 것도 특징이다. 1807년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집권 세력인 피트파와 야당을 대표하는 폭스파의 협력으로 통과됐다.
시쳇말로 개혁은 ‘착한 놈과 나쁜 놈이 힘을 합쳐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윌버포스와 동료들은 공손하지만 끈질긴 태도로 반대파를 설득해 46년 만에 노예제와 노예무역 폐지법 제정을 끌어냈다. 국내 정치인들이 새길 지점이 적잖다.”
-하지만 영 제국은 이들 법안 철폐로 상당한 국가적 손실을 보았다.
“반노예제 운동은 영국 본토뿐 아니라 식민지인 서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의 경제적 이익의 상당 부분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영국은 1833년 노예 해방을 위해 국가 예산의 40%에 달하는 2000만 파운드를 지출했다. 미국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노예무역을 포기한 대가로 영국이 입은 손실액을 260조 달러로 추산한다.
그럼에도 윌버포스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악습 폐지가 곧 이익’이란 주장을 논리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장은 노예무역이 이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랜 항해로 숙련된 선원을 잃을 위험이 크고 식민지로 노예를 데려가기까지 관리 비용도 꽤 들었다. 이와 함께 “강요된 노동보다 임금 노동이 효율적”임도 강조했다.
저는 윌버포스가 ‘도덕 자본의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복음주의자가 아닌 이들도 반노예제 운동에 흔쾌히 동참한 배경이다. 이들 법안 통과 이후 영국은 브라질 스페인령 쿠바 등 타국의 노예무역 폐지에 적극 나서며 제해권(制海權)을 확장했다. 지금도 영국과 미국이 인권 등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하다.
“책의 부제가 ‘스테이츠맨(Statesman), 정치가의 길’이다. ‘존경받는 정치인’이란 의미를 가진 스테이츠맨은 정치인(politician)과는 구분된다. 지금 우리에겐 국가적 난국을 헤쳐나갈 큰 인물, 윌버포스 같은 이상적으로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스테이츠맨이 절실하다. 이념과 계층, 세대와 지역, 성별로 갈라진 이 나라를 통합하고 부동산과 교육에 얽혀 있는 부정의를 해소하며 더 나아가 한반도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이가 요청된다.
한국교회 역할도 주문하고 싶다. 국민이 반으로 갈라진 지금, 이 분열과 아픔을 치유하는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 요즘 시국 속 우리 상황은 마치 타다남은 재 같다. 재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누군가가 제 책을 읽고 스테이츠맨을 꿈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찰 것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