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말 한마디

입력 2025-02-21 00:37

최근 이사를 했다. 차로 15분 거리 가까운 동네로 옮기는 거였지만, 이사는 이사였다. 최강 한파는 덤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세상사 뜻대로만 되던가. 시스템옷장 조립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거기 들어갈 짐들이 갈 곳을 잃은 채 쌓여만 갔다. “이 짐은 어디로 갈까요?” 한 곳이 막히니 다른 곳도 막혔다.

날은 추운데 정리는 안 되고, 그렇게 지쳐갈 때쯤 아이가 말했다. “아빠, 여기 봐요. 하늘이 너무 예뻐요.”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는 반쯤 짐에 가린 창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아이 시선을 따라가 보니 붉은 노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아이의 그 말 한 마디에 추위에 떨던 몸도, 얼어붙었던 마음도 녹았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순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아이의 여유가 참 좋았다.

아이의 말에 위로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도 해서 그때마다 메모해두곤 한다. 한번은 뜬금없이 “아빠는 충전기”라고 했다. 아빠가 자길 보고 있으면 충전이 된다나. 그 뒤에 말이 더 기억에 남는다. “얼른 엄마도 충전시키세요.” 어떻게 이런 말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도 아이였을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살면서 큰 위로가 됐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대개는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일 때가 많다. 말의 온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슴속) 깊은 울림을 준다. 우연히 본 짧은 글귀나 시 한 문단으로 감동을 느낄 수도 있고 일상 속 안부 인사가 그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할 수도 있다. 다만 따뜻한 말의 힘이 큰 것만큼 그 반대의 영역에서는 잔인함이 배가 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린 그런 일들을 보다 더 자주 목도하게 된다.

영화 ‘아저씨’ 속 소미가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이 영화보다 더 잔인했다. 총칼이 날아드는 그 세계에선 버텨냈는데, 현실 속 그보다 날카로운 말들에 꽃을 못다 피운 채 꺾여 나갔다. 그의 부고를 기사로 접하면서 더 충격을 받았던 건 그 말들을 던진 ‘악플러’의 이중성이었다. 현실의 소미에게 ‘알코올 중독자’ ‘밉상’ 등의 악성 댓글을 쏟아냈던 한 네티즌은 그의 사망 소식에 ‘예쁜 아이였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추모의 글을 달았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 쓴 글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악플러 심리를 연구한 한 대학 교수는 어떤 유형의 악플러이든 대개는 순간적인 감정을 마치 배설하듯 쏟아놓는다고 했다. 상대를 깎아내리면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자신이 단 댓글이 주목이라도 받으면 거기에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상대의 고통을 대면하지 않는 구조이다 보니 거리낌도 없다고 했다. 이 네티즌도 그랬을까. 소미의 고통을 마주한 지금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까. 말이란 건 돌고 돌아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들이 비수가 돼 스스로를 옭아맬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한 웹툰 작가가 말에 대해 써놓은 글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무엇이든 그려주는 이 작가는 말 한 마디의 힘을 표현해 달라는 독자의 요청에 ‘다 가게 되거나, 다가가게 되거나’라고 썼다. 고작 한 글자 차이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표현한 것일 테다. 어떤 말은 모두를 떠나게 하지만 어떤 말은 서로를 가깝게 한다.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 돋친 말은 영혼을 상하게 한다. 우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황인호 경제부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