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을 심리한 1심은 북송 과정에서 문재인정부 안보라인 인사들의 위법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선고유예로 선처하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책임자를 실형 등으로 처벌한다고 해서 이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을 근본적 해결책이 될지 의문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장기간 분단 상황을 거론하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내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허경무)는 19일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 “형식적·실질적 적법 절차를 준수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재판부는 북한 주민의 국적에 대해 “출생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 지위를 취득했다”고 밝혔다.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이 있는 이상 헌법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 효력이 미친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 북한 주민 한 명은 대한민국 국민인 북한 주민의 자녀로 태어났고 다른 한 명은 고아라서 부모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국적법상 기아, 버려진 아이로 판단될 수 있다”고 밝혔다.
북송 결정·집행의 위법성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북한 주민들이 송환으로 인해 입은 기본권 침해가 심대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위법·부당의 정도가 형사처벌 사유에 이른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또 북한 주민들이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했다는 점을 이유로 ‘흉악범을 격리해 국민 안전을 보호한 것’이라는 피고인 측 주장도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북한 주민들의 귀순 의사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귀순 의사를 밝혔는데 진정한지 판단하기 시작하면 국가가 국민을 선별해서 받을 수 있는 위험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북한 주민들을 체포·감금한 혐의, 경찰특공대원과 통일부 직원 등에게 강제 북송이라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혐의 등을 무죄로 판단했다. 피고인들의 직무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서 전 원장이 자백 보고서에서 ‘귀순 의사’를 제외하고 대공 혐의점을 ‘희박’에서 ‘없음’으로 바꾸는 등 허위 공문서를 작성·행사했다는 혐의에 대해 “평가의 차이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정 전 실장과 서 전 원장이 중앙합동정보조사의 조기 종결을 지시한 혐의도 조사 목적인 ‘대공 혐의점 파악’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문제 없다고 봤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2019년 11월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는 기회에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초청하려 했고, 북한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탈북 어민 북송을 결정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정상회담 20일 전에 친서를 전달하면서 실현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는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또 윤석열 대통령이 이 사건 북송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발언하는 등 검찰 기소 배경에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상황이 반영됐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공소기각할 정도는 아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남북 분단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법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공백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며 “이런 사정은 현 정권에도 적용된다”고 했다. 이어 “처벌보다 제도가 개선돼 이런 분쟁이 반복되지 않는 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훨씬 유익하다”며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