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없는 버티기… 2026학년도 의대정원 확정도 ‘시계제로’

입력 2025-02-19 18:47
사진=권현구 기자

지난해 2월 의대 증원 발표로 촉발된 의·정 갈등이 별다른 해법 없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국회에서 추진 중인 ‘의료 인력 수급 추계위원회’(추계위)가 해결의 실마리가 될 거란 기대도 있지만 이마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은 당장 논의를 시작해야 4월까지 결론을 낼 수 있지만 ‘버티기 국면’이 계속되면서 의·정 갈등의 향방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다.

순탄치 않은 추계위 논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19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추계위 신설 법안을 ‘계류’(계속 심사) 결정했다. 본래 21일 전체회의를 거쳐 이달 중 본회의를 통과시킬 계획이었지만 ‘의료 현장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들을 추가 검토·반영하기로 한 것이다.

의료계는 그동안 추계위에서 심의한 내용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의결권’과 ‘독립성 담보’, ‘의사 위원 과반’을 주장해 왔다. 이 중 의료계에서 요구하는 ‘독립성’을 위해 추계위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산하에 두지 않는 방향으로 조문이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 복지위원들은 이달 중 추계위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도록 가급적 빨리 추계위 법안을 원포인트 심사하겠다는 계획이다.

의대 정원을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심사하기 위해 추계위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달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법안이 시행되고 추계위가 구성되는 데 최소 한 달이 소요될 전망이다. 의대 정원은 5월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시행계획을 공고하면 확정되기 때문에 4월 말까지는 정부가 정원 논의를 마쳐야 한다. 추계위에서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논의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이에 정부는 지난 18일 국회에 제출한 법안 수정대안에서 ‘대학에서 자율로 정원 결정’이라는 부칙을 달아 대안을 제시했다. 추계위에서 내년도 의사 정원을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 4월 30일까지 모집인원을 변경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의료계는 정부가 책임을 대학에 전가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김성근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국민일보에 “의료계에 사전 설명도 없이 급조된 면이 있어 보인다”며 “모집 정원에 관해 의견이 다른 대학 본부와 의과대학에 다툼을 부추기는 꼴”이라고 말했다.

각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장으로 구성된 단체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19일 의대가 있는 각 총장에게 “내년도 의대 정원은 재설정(reset)해야 한다”고 협조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종태 KAMC 이사장은 “‘증원 0명’은 의대생과 전공의가 복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립만 하다가 무너진 의·정 신뢰


지난해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와 같은 달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사태로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통째로 흔들렸다. 정부는 초기 업무개시명령과 면허 정지 처분을 내리며 강경대응했고, 6월에 대법원이 ‘의대 증원 효력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한 이후에는 모든 전공의에 대한 행정 처분을 철회하며 각종 유인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2025년 전공의 레지던트 1년차 모집에는 3594명 모집 중 314명(8.7%)만 지원했다. 올해 정부는 복귀 전공의에게 수련·입영 특례도 적용했으나 상반기 전공의 모집은 199명(2.2%) 지원에 그쳤다.

의·정 갈등을 풀어내기 어렵게 만드는 배경은 무너진 신뢰에 있다. 정부는 대화의 장이 열려 있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는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제로베이스’라는 표현을 꺼내 들며 의료계를 설득했다. 그러나 원점 논의에 대해서도 의료계와 정부의 시각차가 존재한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18일 국회에서 “(의대 정원은) ‘롤백’(정책을 되돌리기)보다 여러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잘 균형 잡아서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겠다”고 말했다. 반면 의료계는 올해 의대생이 늘어난 만큼 ‘감원’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의대 정원은 지난해 ‘0명’과 ‘2000명’ 사이의 논쟁이었으나 올해는 ‘7500명 의대생 교육’ 문제가 더해져 셈법이 더 복잡해졌다. 휴학한 24학번 의대생 3000명과 신입생 4500명이 한꺼번에 강의를 들을 경우 교육 인프라가 이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게 의료계 주장이다. 반면 정부는 예과 1학년 수업이 대부분 교양이고, 본과 1학년 실습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학이 준비할 시간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대학별 상황에 맞춰 의대 교육 종합대책도 마련 중이다.

무엇보다 의·정 갈등이 1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부와 의료계가 기존 입장을 굽히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의료대란 고비를 넘기고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병원들이 정상 가동하고 있는 점에 힘입어 의료개혁을 추진 중이다. 의료계는 ‘사직’이라는 유일한 카드를 사용했지만 전공의·의대생의 단일대오가 강력한 무기다. 3월 개강과 함께 어느 정도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갈지 정부와 의료계가 모두 주목하는 이유다.

추계위 법안 통과와 내년도 의대 정원 논의가 학생들이 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대학 입시 일정을 고려하면 최대한 빨리 (정원) 논의가 시작돼야 하고, 추계위 법안도 서둘러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이정헌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