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독일 모델은 끝났다”

입력 2025-02-20 00:38

2011년 출간된 책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는 ‘그들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일 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가 부제인 이 책이 말하는 ‘그들’은 독일이다. 저자는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미국보다 탄탄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사회안전망이 갖춰져 있는 독일이 더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독일 모델’ 예찬이다. 미국 변호사만 독일을 롤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일보도 2012~2013년 특별취재팀을 꾸려 독일을 창조적으로 벤치마킹하자는 취지의 시리즈를 보도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이번 주말 치러지는 독일 총선에서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한 사람은 기독민주당(CDU)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나라의 비즈니스 모델은 끝났다”고 말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기업 경영자들이 혐오하는 규제와 전쟁을 할 것이고, 일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돈을 지급하는 복지 제도를 축소하겠다고 했다. 14년 전 미국 변호사가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독일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최근 두 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올해는 겨우 0.3% 성장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전망한다. 2010년대 유럽의 최강국이던 독일이 고꾸라진 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정타 역할을 했다. 낮은 가격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되면서 에너지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탈원전 선언으로 대체 에너지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이는 생산비용 증가와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중국의 추격도 독일 모델을 무너뜨린 요인이다. 중국 전기차의 약진에 독일 자동차 업체들의 중국 시장 판매가 급감했다. 폭스바겐과 포르쉐는 최근 잇따라 감원·감산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이 핵심 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디리스킹(위험 제거)에 동참하면서 대중국 수출도 줄었다. 지난해 독일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독일 모델이 실패한 데는 내적인 이유도 있다. 지난달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은 병가에 있어 세계 챔피언’이라며 관련 정책이 기업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독일 노동자는 특별히 더 아플 이유가 없는데 유럽연합 평균인 연 8일의 2배 가까운 15일의 유급 병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앞서 메르츠 대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기업에 불리한 규제를 제때 해소하지 못한 게 낮은 경쟁력의 이유다. 낡은 인프라를 그대로 두고 고령화에 대응하지 못해 인재가 부족해진 게 독일 모델이 실패한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한때 독일 모델을 대안으로 고민했던 한국의 입장에서 지금의 독일은 또 다른 의미에서 탐구 대상이 됐다. 독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벤치마킹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독일과 비슷한 제조업 중심 국가인 한국에서 공장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 비용이 증가하면 산업 전체에 재앙이 된다. 인공지능(AI) 사용이 더 늘어나면 전력도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의 추격을 경계하면서 중국 시장을 잃지 않는 지혜도 중요하다. 미국의 중국 견제에 무조건 동참하기보다 교역상 득실을 잘 따져보고 행동할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어떤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경제 체질을 튼튼히 하는 게 중요하다. 아직 해외 주요국에 못 미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핵심인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 분야에서 개혁과 규제 완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핵심 산업 분야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지 않게 저출산 대응도 계속해야 한다.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