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가 걸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놓아주는 낚시꾼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서 큰 물고기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낚시터에서는 큰 물고기를 잡아두고 작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장면은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신앙에서도 이 같은 선택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핑계 삼아 그 비전을 축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큰 손해입니다.
19세기 미국 최고의 설교자로 꼽히는 필립스 브룩스(1835~1893)는 “당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당신의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따르는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능력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위대한 일을 맡기십니다. 그 비전을 이루는 데 필요한 능력 또한 친히 공급하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위대한 삶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 위대한 교회와 성도는 ‘위대한 명령’에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상명령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절대적 사명입니다. 교회 규모나 교단, 성도 수와 상관없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위대한 교회이며 이를 따르는 성도가 위대한 성도입니다.
세계 복음화, 즉 선교라는 비전은 너무 거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 주변에도 복음이 필요한 이들이 많은데 미전도종족이나 먼 나라의 사람들까지 신경 써야 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상명령이 처음 주어졌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조차 부활하신 주님을 보며 의심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유대 땅을 넘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승천하셨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큰 그림을 그리십니다. 시몬을 부르시며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그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에게도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게 된다고 하신 약속은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척박해도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시고 강을 만드시는 분입니다.(사 43:19)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나 군대로 일어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1761~1834)는 “하나님께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않으면 그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이 같은 땅을 보고도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 명은 가나안 사람들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 중 약속의 땅을 밟은 것은 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야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될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입을 크게 열어 선포하고 믿음으로 세계 선교에 헌신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교회와 위대한 성도로 우리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황덕영 새중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