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무대의 혁명’ 20세기 초 유럽을 홀리다

입력 2025-02-21 02:59
발레 뤼스는 20세기 현대 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사진은 1913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아 전대미문의 논란을 일으킨 ‘봄의 제전’. 퍼블릭 도메인

20세기 초 고작 20년 동안 유지됐지만, 현대 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킨 발레단이 있다. 바로 1909~29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활동한 발레 뤼스(Ballet Russe). 발레 뤼스는 불어로 러시아 발레단이란 뜻이다.

1909년 파리에서 공연한 ‘르 페스탕’ 중 파랑새 파드되를 춘 바츨라프 니진스키. 퍼블릭 도메인

발레 뤼스는 1909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선보였다. ‘아르미드의 별장’, ‘레 실피드’, ‘이고르 공’ 중 폴로비츠 전사의 춤, 다양한 춤들을 모은 갈라 ‘르 페스탕’(향연)으로 구성된 공연은 무용수들의 뛰어난 테크닉과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바츨라프 니진스키, 아돌프 볼름 등 발레리노들의 힘과 관능미는 당시 유럽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로맨틱(낭만주의) 발레 이후 유럽에서 발레리나의 보조 역할로 전락했던 발레리노가 다시 발레의 중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909년 ‘이고르 공’ 중 폴로비츠 전사의 춤에 출연한 아돌프 볼름. 퍼블릭 도메인

19세기 전반 유럽을 강타했던 로맨틱 발레 열풍이 사그라진 후 재능 있는 무용수와 안무가들은 뒤늦게 발레 붐이 분 러시아에 몰려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황실의 후원 아래 마리우스 프티파가 주도한 클래식 발레가 꽃을 피웠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등 유명한 레퍼토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또한, 발레 외에도 당시 러시아는 음악에서도 거장 작곡가들을 대거 배출했다.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국민파 작곡가들과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대표적이다.

발레 뤼스를 이끈 ‘세기의 흥행사’ 세르게이 댜길레프. 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러시아 예술은 20세기 이전까지 러시아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발레 뤼스로 대표되는 러시아 예술을 세계에 알린 인물은 ‘세기의 흥행사’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 러시아에서 예술 평론가와 전시·공연 기획자로 활동하던 귀족 출신의 댜길레프는 1906~08년 파리에서 러시아 미술 전시회와 음악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909년부터 무대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브누아와 레온 박스트, 안무가 미하일 포킨,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과 함께 러시아 발레를 파리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존의 클래식 발레가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의 모던 발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댜길레프의 예술적 취향과 스타일이 바로 발레 뤼스를 만든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댜길레프는 신진 예술가들을 발탁해 기회를 줬다. 신인이던 포킨과 스트라빈스키를 고용하는가 하면 무용수였던 니진스키에게 안무를 시켰다. 또한, 그는 작가 장 콕토,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 화가 파블로 피카소, 디자이너 코코 샤넬 등 당대 뛰어난 유럽 예술가들과도 적극적으로 협업했다. 덕분에 19세기 후반 여흥거리로 전락했던 발레는 20세기 들어 다른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했다.

신간 ‘댜길레프의 제국’은 댜길레프의 삶과 예술적 유산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영국의 저명한 무용 평론가인 저자 루퍼트 크리스천슨이 댜길레프 탄생 150주년이던 2022년 발간했다.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댜길레프와 발레 뤼스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와 스캔들 등까지 포함해 장대한 드라마를 완성했다.

또한, 이 책은 댜길레프 사후 발레 뤼스의 유산이 다음 세대에 전승된 과정도 담았다. 실제로 발레 뤼스 출신 무용수와 안무가가 전 세계로 흩어져 발레단을 만들거나 발레 교실을 운영한 덕분에 20세기 현대 발레의 토대가 마련됐다. 영국 로열발레단과 램버트무용단의 창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와 뉴욕시티발레단의 창단,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부활은 발레 뤼스 출신에 의해 이뤄졌다. 이 책은 댜길레프에 대한 연대기이자 발레 뤼스가 촉발한 20세기 예술혁명에 대한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