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독재자다. 누군가는 욕할지언정 조국의 부흥에 인생을 걸었다. 하지만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다. 야권은 호시탐탐 발목 잡을 기회만 노리고, 제 잇속만 차리는 주변 강대국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온다. 인플레이션과 파업이 끊이지 않고 환경단체, 종교계, 지식인, 언론 등 온갖 세력이 시도 때도 없이 불만을 제기하며 지도자인 당신을 공격한다.
별것 아닌 작은 잘못은 있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우국충정뿐인 당신 속도 모르면서 말이다. 뭔가 마음먹고 해보려 할 때마다 훼방 놓는 녀석들을 지켜보노라면 확 ‘계엄’이라도 저질러버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사실 이 이야기는 25년 넘게 이어져 온 게임 시리즈 ‘트로피코’의 설정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냉전시대 중남미 조그만 섬나라 트로피코의 ‘엘 프레지덴테(대통령)’다. 먹고살 거리라고는 없는 이 나라에서 산업을 일으키고 복지와 교육, 행정 등 정책을 가다듬는 한편 강대국 틈에서 줄을 타며 살길을 개척해야 한다.
물론 핵무기 개발이나 정적 암살, 부정선거, 어느덧 친숙한 단어가 된 계엄령 등 극단적 조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실의 통치자가 저질렀다면 마음 놓고 욕했을 일들을 피통치자인 우리가 되레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기발한 블랙코미디다.
게임 속에서 궁지에 처할수록 여러 비상조치는 더 매력적이다. 쉽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저임금 때문에 아무도 공장에서 일하려 하지 않으면 몸값 싼 외국인을 고용하면 된다. 파업 시위대, 또는 극렬 반동분자가 있으면 주동자를 처형해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다. 복지 정책을 펼치느라 적자의 수렁에 빠졌을 때는 화폐를 손쉽게 증쇄할 수 있다.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번드르르한 가짜 공약을 내세워 패배를 모면할 수 있다. 외교 무대에서 처신을 못 해 국제관계가 파탄 났더라도 핵무장을 해 나라를 지키면 된다.
짐작하다시피 이런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극단적인 조치는 복잡한 매듭을 한칼에 잘라내듯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쉽게 해결할 듯 보이지만 실은 거듭할수록 실패한 통치에 가까워질 뿐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거듭하다 보면 복잡하고 번거롭게만 보였던 정석적인 방법이 사실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귀찮은 정적일지라도 시간을 들여 민주적으로 타협해 나가며, 가진 예산을 최대한 활용해 합리적인 정책을 짜고, 정책의 단기적인 효과뿐 아니라 장기적인 영향까지 함께 고민하는 통치 말이다.
어쩌면 지금 대통령이 맞이한 현실은 게임 속에서처럼 ‘쉬운 통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결과물이다. 그는 당을 마음대로 할 수 없자 상대 정파를 윽박지르듯 축출하고, 야권이 장악한 국회가 발목을 잡자 법적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찍어눌렀다. 개혁 대상으로 명명한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가 하면 비판적인 언론은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듯 ‘어려운 통치’에 서툴렀던 대통령은 선거에서 참패하자 이를 손쉽게 설명할 부정선거론에 의탁했고, 급기야 게임 속 플레이어조차 누르기 망설일 계엄 버튼을 대책 없이 눌러버렸다.
쉬운 통치, 즉 극단의 통치가 각광받는 건 사실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갈등과 불황이 만연한 지금의 세계에서 현실의 복잡한 매듭은 갈수록 풀기 어려워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멀고 난망할수록 거칠지라도 속 시원한 통치에 열광하는 이들은 분야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어만 간다.
지도자들은 그들을 설득하긴커녕 열광에 편승하거나 동조해 정치적인 기회를 노린다. 그렇게 힘을 받은 요구는 우리가 얼마 전 계엄에서, 또 법원 습격에서 목격했듯 때로 체제 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쉬운 통치의 시대는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새 정권이 탄생하든, 혹은 대통령이 자리에 돌아오든 앞으로도 세상에는 더 복잡하고 풀기 힘든 숙제가 많아질 테니 말이다. 그럴수록 우리에겐 열광보다는 옳은 길을 숙고하는 통치가, 어느 길로 갈지를 함께 논의하고 한 발짝씩 내딛는 통치가 절실하다. 그런 통치를 향한 믿음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게임 속에서나 등장할 장면을 어쩌면 몇 차례 더 볼지도 모른다. 다만 게임 속 선택과 현실의 무게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 결과도 더 엄중하다. 알다시피 현실에서 실패한 통치의 결과란 ‘게임오버’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