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방] 책방지기, 치열한 삶의 현장

입력 2025-02-22 00:30

제주에서 ‘어쩌다 책방지기’ 일을 잠시 했다. 애월에 있는 보배책방의 정보배 대표가 잠시 책방을 비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다 싶어 날름 책방을 대신 봐주기로 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한 사람이 문학평론을 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이 영화평론을 한다고 하던가. 나 역시 책방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서점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이럴 게 아니라 잠시라도 온전하게 책방을 책임져 보면 어떨까 싶었다.

제주의 2월은 날이 궂다. 눈 오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춥다. 그래도 여행자는 있었다. 난방과 음악을 틀고 책방 문을 열면 여행자들이 하나둘 책방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추운데 책방에 손님이 올까 하는 건 기우였다. 초보 책방지기에게는 손님을 응대하고, 주문한 차를 내고, 계산하는 것도 벅찼다. 허브차를 주문하고 20분이나 기다린 분도 있었고, 재고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애를 먹기도 했다. 카드단말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손님들이 초보 책방지기를 도왔다. 첫날 책방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필자가 쓴 ‘유럽책방 문화탐구’를 직판하리라 꿈꿨지만 웬걸 그럴 정신이 없었다. 이날 저녁 “역시 체험 삶의 현장은 힘들구나” 하며 지친 몸 달래야 했다.

다음 날도 흥미로운 일이 이어졌다. 오전에 잠시 책방을 살피러 갔는데, 손님이 들이닥쳤다. 오픈 시간도 아닌데 웬일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초등 고학년의 토론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놀라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주인이 없어도, 책방 문을 아직 열지 않았어도 모두 알아서 불을 켜고, 차를 내리고, 책을 읽고, 토론 수업을 했다. 순간 이 책방의 주인은 누구인가 싶었다. 동네책방이란 자영업이며 상업공간이다. 하지만 함께 이용하고 즐기는 공동체의 공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마침 문을 열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하는 생각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

보배책방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책방지기가 있다. 인사를 드리고 몇 가지 책방에 관해 공유할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자로 왔다가 우연히 일을 하게 되었다는 이지연 책방지기는 이런 말을 했다. “책방에서 일하면 책 읽을 시간이 있을 줄 알았어요.” 그 말에 초보 책방지기 노릇을 해본 나도 공감하며 웃었다. 사실 책방지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은근한 로망이다. 서점에서 좋아하는 책도 읽고 공간을 고요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있다. 제주의 이후책방은 아예 숙소를 제공하며 일일 책방지기 체험을 받고 있다. 매월 체험 일정이 공지되며 4만원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

신기하게도 내가 일하지 않을 때, 보배책방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했다. 음악은 잔잔하고, 분위기는 아늑해서 잠시 앉아 책을 읽고 싶은 곳으로 탈바꿈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고즈넉한 책방을 꿈꾼다면, 책방 대표가 아니라 책방의 손님을 권한다. 책방이 독자에게 몰입과 치유와 경험을 제공하는 아날로그 공간은 맞지만, 책방 대표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니까.

한미화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