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정말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팩트(fact), 즉 사실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가져다가 본인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사용하고 많은 사람이 이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사실이 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실이나 진리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나 진실로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진실이 된다. 이는 역사적 사건에도 해당하고 역사 속의 한 인물에게도 해당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대통령 탄핵을 놓고 나라가 두 쪽 난 상황에서 어느 한쪽에 서 있는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의 입을 통해 20세기 초입 독일의 신학자요 목회자이면서 나치에 저항하다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을 듣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극우 근본주의 성향의 모 목사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많은 기독교인이 본회퍼를 이 흐름에 서 있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로운 신앙 모델로 인식한다.
그가 행동하는 신앙인이요 값싼 은총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실천하는 은총을 소중히 여겨 나치의 폭압에 저항하는 실천적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치에 의해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20세기 기독교 순교자로 추앙받는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오늘날 특정 이념의 편에 서서 그 반대편의 이념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항하고 싸우는 것은 본회퍼 같은 행동하는 신앙의 전형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서둘러 말한다면 본회퍼에 대한 완전한 오독이다. 하늘에 있는 본회퍼가 한국교회에서 자신을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본회퍼 자신의 신앙과 실천의 핵심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을 넘어 전복이라 할 정도로 정반대의 인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본회퍼의 저항은 끝없는 인간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나치즘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의 통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봤다. 나치즘은 전체주의요 전체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부재다. 위대한 독일의 재건이라는 단일한 국가통치 슬로건으로 개인의 자유는 물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유대인 같은 특정 민족이나 대상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독일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려 했다. 본회퍼는 이 전체주의적 나치즘이 적그리스도적이라 보았다.
둘째, 본회퍼의 저항은 국민에게 추앙받다 못해 신격화되기 시작했던 히틀러 우상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셋째, 본회퍼의 저항적 신앙은 독일 국민은 말할 것 없고 독일의 국가교회인 루터교회까지 투항해 거역할 수 없는 국가의 대세가 돼 버린 나치즘과 그 수장 히틀러에게서 홀로 떨어져 나와 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던 외로운 싸움이었다. 고백교회 운동은 바로 이 흐름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정신의 핵심은 그 어떤 정치, 이념, 이데올로기도 그리스도의 말씀, 특히 산상수훈에 어긋날 때 교회는 이에 저항해야 하며 이것이 교회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충성이라고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시 대다수 독일 국민에게 미움받는 길을 택했고 독일이라는 국가가 가는 길에 대해 저항한 것이다. 독일에 대한 애국보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였고 이 하나님 사랑이 진정 독일을 사랑하는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2025년 현재 기독교 신앙을 특정한 이념적 확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과 동일시하면서 본회퍼의 행동신앙을 모델로 언급하는 한국 기독교의 본회퍼 이해와 얼마나 대비되는가. 맞다. 오늘날 진정 교회는 본회퍼에게서 배워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 대해 절대 충성하고 심지어 국가와 국민 전체가 국가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잘못된 길을 갈 때 그것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적 신앙의 근간은 우리 왕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이다.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