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에 다케오(入江毅夫)는 일본 교토에서 ‘이조당’이라는 고미술점을 운영한 화상이자 한국의 고서화 최고 컬렉터였다. 그는 1996년 자신의 소장품을 선별해 ‘유현재선한국고서화도록((幽玄齋選韓國古書畵圖錄)’을 발간했다. 유현재(幽玄齋)는 이리에 다케오의 자택 당호다. 중국과 한국의 고미술품 총 740여점이 수록된 이 도록에서 한국 관련은 고려 말기∼조선 말기 고서화 550점이나 된다. 특히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화가들이 현지에서 그린 회화가 100점 이상 수록돼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유현재 컬렉션은 1997년 금융과 건설로 부를 쌓은 재일교포 3세 수장가 나카무라(中村·한국명 진창식)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 재일교포 수장가가 사망하면서 한국 관련 유현재 컬렉션의 절반 이상이 통째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이아트옥션 공상구 대표는 17일 “일본에서 시중에 매물로 나온 유현재 컬렉션을 일본과 미국 인수의향자를 제치고 어렵게 인수했다”면서 “국공립미술관에 우선권을 줘 6건이 이미 매매가 성사됐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북송의 시인 산곡 황정견의 서첩을 소장하며 협서(덧붙인 글씨)를 한 ‘칠불계’, 궁중 회화 십장생도, ‘평양성도(平壤城圖)’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아트옥션은 27일 열리는 새해 첫 메이저 경매에서도 유현재 컬렉션을 11점을 내놓는다. 가장 관심을 받는 고서화는 ‘사인풍속도(士人風俗圖)-북일영·남소영·세검정’과 조선 후기 지도식 진경산수화 ‘영남명승 35경도첩’ 2건이다. 각각 시작가가 12억원으로 이번 경매에서 최고가로 나왔다.
한양의 두 병영인 북일영과 남소영, 물 맑은 계곡인 세검정에서 선비들이 각각 가진 특별한 행사 장면을 담은 ‘사인풍속도’는 누가 그렸는지, 모임 취지가 무엇인지, 언제 몇 점씩 제작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대박물관에 이것과 똑같은 필치와 형태로 북일영과 남소영을 그린 2폭 그림이 소장돼 있다. 이 회화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정돼 유현재 컬렉션에 포함된 이 사인풍속도 역시 김홍도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마이아트 옥션 측은 밝혔다.
영남 지방의 손꼽히는 명소를 담은 ‘영남명승 35경도첩’은 수묵채색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린 각 35점의 산수화 오른쪽 상단 구석에 지역과 명승지 이름이 해서체로 쓰여 있다. 그린 화가를 알 수 없지만, 겸재 정선이 하양 현감과 청하 현감을 지내며 영남의 절경 명승을 남긴 바 있어 그 이후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1643년 함께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간 설봉 김의신이 글씨를 쓰고, 연담 김명국이 그림을 그린 ‘설봉서첩’(1663)도 나왔다. 추정가는 3억∼5억원이다. 이밖에 긍재 김득신의 ‘해암응일도’, 기야 이방운의 ‘산수도 6폭 병풍’, 형당 유재소의 ‘형당화의첩’ 등도 유현재 컬렉션에 포함됐다.
마이아트옥션 측은 “유현재 컬렉션이 낙찰될 경우 조선시대 중요 고서화가 제대로 한국인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 종로구 인사동 마이아트옥션 사옥에서 27일 진행하는 경매에는 유현재 컬렉션을 비롯한 고서화와 도자, 공예 등 총 136점 약 76억원어치(시작가 총액)가 출품됐다. 프리뷰는 17일부터 26일까지 마이아트옥션하우스 본관과 분관에서 각각 진행된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