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변호사가 쓰는 국적 뒤섞인 용어들…
‘노가다’ 공사장 말과 무엇이 다른가
‘노가다’ 공사장 말과 무엇이 다른가
“오늘은 주변 어디젼이 심해 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요. 바이털 어때요?” “BP 120이고 하트 레이트 70에서 80 정도로 스테이블합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한 장면이다. 한국 드라마인데 자막이 없으면 뭔 말인지 알 수 없다. 근데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요즘 헌법재판소 재판 과정 중계를 종종 본다. 재판관, 변호인 모두 일본식 한자 마구 섞어가며 말한다. 국어국문학 전공했고, 15년 가까이 글 써서 먹고살았으며, 심지어 한자 2급인 나조차도 생소한 단어가 많다. 이 역시 아무도 뭐라 안 한다.
왜냐. 그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에서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각종 도구와 기계의 사용법을 배운다는 것이고, 그 사용법은 해당 분야에 앞선 기술을 가진 이들의 언어로 돼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의사는 영어로 범벅된 의학용어 쓰고, 법조인은 일본식 한자로 버무린 법률용어 쓴다. 그런 맥락에서 건설노동자는 매우 당연하게 ‘노가다’ 용어라는 걸 쓰는 거다. 단지 그뿐이다.
그래도 ‘노가다’는 일본어 투니까 쓰지 말라고 꾸짖을지 모르겠다. 참고로 한 교수는 같은 책에서 “살아 있는 한국어는 방언의 집합체이지 규범집에 있는 표준어가 아니다”면서 “다른 나라 말에서 흘러 들어온 말도,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는 말들도 우리말의 일부”라고 강조한다. 이렇듯 국어 순화라는 당위에 관해서도 고민해 볼 일이지만, 논외로 하고.
거꾸로 묻는다.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돈가스가 일본어 투라는 건 아는지. 영국 튀김 요리 커틀릿(cutlet)의 일본식 발음이 가츠레츠(カツレツ)다. 여기에 돼지 돈(豚, とん)을 합쳐 톤가츠레츠(豚カツカツレツ), 즉 돈가스가 됐다. 이뿐이랴. 냄비, 택배, 게양, 담배, 고무, 구두, 가출, 후불, 추월, 엽서, 견적, 심지어 고구마(대마도 방언 코코이모·こうこういも에서 차용된 것으로 추정)까지 모두 일본어에 뿌리 둔다.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일본어투 용어 순화 자료집’에 수록한 단어만 1000개가 넘는다.
일본식 한자는 또 어떻고. 녹색창에 ‘일본식 한자어’ 한 번 검색해 보라. 스크롤바를 끝없이 내려야 한다. 대표적인 일본식 한자 접두사 또는 접미사가 철학, 과학, 문학 등의 학(學)이다. 배타적, 이기적 등의 적(的), 생방송, 생중계 등의 생(生)과 입구, 출구, 비상구 등의 구(口)도 마찬가지다. 소유격 조사 ‘의’도 일본 격조사 노(の)에서 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한마디로 원칙과 기준이 없다는 거다. 어디까지가 우리말이고, 어디서부터 순화해야 할 대상인 걸까.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무려 100년이나 망치질하며 사용한 ‘노가다’ 용어는, 역사성과 고유성과 전문성 모두를 배제한 채 그저 순화해야 할 대상인 걸까.
그냥 그렇게 돈가스(순화어는 돼지고기너비튀김이다)를 맛있게 먹으면서, 택배로 구두와 냄비, 고구마 따위를 받으면 되는 걸까. 의학용어 쓰는 의사는 영어가 유창한 거고, 법률용어 쓰는 법률가는 한자에 해박한 거지만 ‘노가다’ 용어 쓰는 건설노동자는 못 배워먹은 사람인 건가. 한 교수는 이를 ‘유권유언 무권무언’이라고 비판한다.
“순화와 바른 말 쓰기 운동은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어 주로 사회적 권력이 없는 이들에게 강요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이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 뿌리 깊은 편견이 건설노동자만 국어 파괴자로 만든다. 한 교수 말마따나 “전문가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정확하고도 빠른 소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만의 세상을 인정해야 한다”는데, 그러질 않는다. 무지하거나 무례하다. 그래서 공공연히 스스로를 글 쓰는 ‘노가다꾼’이라 칭한다. 그게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작가 동명 저서에서 인용)에 맞서는 방식이다. 나는 노가다꾼이다.
송주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