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으로 만든 탱크·서울 하늘 전투기… 오늘, 우리 옆의 무기들

입력 2025-02-19 00:00 수정 2025-02-19 00:00
허보리, ‘부드러운 K9’(양복·이불솜·실·바느질·앵글프레임, 515×200×150㎝, 2020). 서울대미술관 제공

탱크가 보인다. 차갑고 육중한 금속이 아닌 천으로 제작돼 낯설다. 천은 남성성의 상징인 넥타이와 양복을 재활한 것이다. 허보리 작가의 이 작품은 매일의 일상이 전쟁터 같은 신자본주의 경쟁체제를 고발하는 조형 언어일 수 있겠다.

이처럼 무기를 통해 우리 사회, 우리 시대를 성찰하겠다며 ‘무기세(武器世)’라는 용어를 내건 전시가 있다.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하는 기획전 ‘무기세’이다. 무기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을 통해 무기의 생산과 방위 산업이 지구 환경과 인류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무기세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 지질이나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주목해 지금의 지질 시대를 ‘인류세(人類世)’라 부르는 것에서 착안했다.

이 기획전은 지난해 개막했다면 생뚱맞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계엄을 시도해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짐에 따라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시의적절한 전시가 됐다.

강홍구, ‘전쟁공포 2’(디지털C-프린트, 1998). 서울대미술관 제공

전시에는 회화, 조각, 설치 등 국내외 총 18명 작가의 120여점 작품이 나왔다. 전시는 1부 ‘무기화된 일상’에서 일상적 사물과 무기의 형식을 결합한 예술작품을 통해 살생을 위한 무기가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 되는 현실을 조명한다. 허보리 작가의 천으로 만든 탱크 작품도 여기에 나온다. 사진작가 강홍구는 서울 상공의 전투기 등 분단 상황에서 사는 한국인의 전쟁 공포를 사진에 담았다. 미국 사진작가 폴 샬브룸 역시 미국 전역 공공장소에서 전시되고 있는 무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2부 ‘스펙터클로서의 무기’는 뉴스, 영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플랫폼 등 미디어에 만연한 무기의 스펙터클함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다. 전투기의 형상을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착한 권기동, 과거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프로파간다 영상과 해안에 잔존한 불발탄을 해체하는 베트남 광찌 지역의 현재 모습을 동시에 담은 투안 앤드류 응우옌의 작품 등이 나왔다.

3부 ‘무기, 낯익은 미래’는 무기로 인해 파괴된 땅,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생명에 집중한다. 독일 같은 방위 산업 강국이 과테말라와 같은 후진국의 내전에 미치는 영향을 퍼포먼스와 비디오로 폭로하는 레지나 호세 갈린도,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민주화를 각기 겪은 한국의 한 집안 여러 세대의 삶을 조각 작품으로 형상화한 오제성, 미군 사격장으로 사용됐던 경기 화성군 매향리 풍경을 사진에 담은 강용석, 핵 기술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진작가 박진영과 화가 방정아의 작업도 이 섹션에서 볼 수 있다.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은 “수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이 잇따라 일어나며 새삼 전쟁 공포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 한국 역시 분단국가이자 세계 9위 무기 수출국으로서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면서 “무기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만화경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술의 역할을 환기하는 장을 마련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