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입력 2025-02-18 00:31

언젠가 사업하는 한 성도가 정직하게 사업하기 너무 어렵다고 토로하며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한마디로 ‘뻔뻔함’인 것 같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고, 거짓이 드러나더라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커녕 더 강하게 받아치며 심지어 상대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굳이 다른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요즘은 TV만 켜도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회 청문회나 헌법재판소의 재판정 등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자리에서조차 조금 전에 했던 증언이 자신이 하루 전 했던 말로 반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이다. 새번역 성경에선 더 정확히 ‘거짓 증언’이라고 번역한다. 일상 속 거짓말들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닌, 재판정에서 일어나는 ‘증언’에 대한 계명인 것이다.

여기엔 주어진 목적이 있다. 현대의 형사재판은 누군가 범죄에 연루되면, 피해자든 국가든 제3자에 의해서든 고소 혹은 고발이 이뤄지고 수사기관이 수사를 통해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며 전체 사건의 얼개를 짠다. 그래서 위법이라고 추정되면 검사가 구형하고 피의자는 변호사를 통해 변호를 받으며 이를 참고한 판사가 최종적으로 판결한다. 이 과정에서 물론 증언도 참고하지만 철저히 ‘증거 중심주의’로 판결한다. 그런데 9계명이 주어진 당시는 수사기관은커녕 수사 능력 자체가 불충분했다. 때문에 증언에 의해서 재판하는 ‘증언 중심주의’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 누군가의 거짓 증언은 또 다른 누군가의 재산과 명예, 심지어 목숨까지도 빼앗아 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땠을까. 특히 원고 혹은 피고의 권력과 재력이 엄청나다면 진실이 쉽게 뒤집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증을 억제할 장치가 필요했다. 지금은 위증죄로 처벌받을 것에 대해 선서를 하지만 수사 능력이 부재했던 당시는 결국 ‘신’의 이름으로 선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9계명이 주어졌다. 대체로는 신의 심판을 두려워했기에 유효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같다. 신이 아무리 두려워도, 당장 죽게 생긴 자, 반대로 당장의 큰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자들은 거짓 증언을 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다 해도 다를 것 없었다.

그래서인지 예수는 9계명을 이렇게 해설한다. ‘맹세하지 말라.’(마 5:34) 맹세 자체가 악해서는 아니다. 인간은 언제든 자기를 기준으로 거짓 증언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쉽게 속이는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이 도발적 해설은 결국 네가 “예”라고 하면 정말 “예”이고, 네가 “아니요”라고 하면 정말 “아니요”라고 사람들이 믿어줄 만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네가 맹세조차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즉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진실만 말하는 태도로 전환하셨고, 맹세조차 필요 없는 자가 되라는 고차원의 윤리를 말씀하셨다.

뻔뻔하게 거짓 증언함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박탈당할 수 있다. 뻔뻔하게 거짓 증언하는 문화는 그 사회를 피곤하게 만든다. 상대의 말에 대해 언제나 의심과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이 소통을 포기하는 것 같다. 피곤하니까. 하루 종일 듣기평가를 해야 한다면 과연 듣고 싶을까. 이처럼 뻔뻔함과 소통은 반비례 관계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디 거짓 증언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라.

그런데 참담하다. 정교분리와 함께 국가의 비종교화가 이뤄진 근대 이후, 더불어 수사능력의 확보를 통해 위증 여부를 밝혀낼 수 있게 된 이후로,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선서하지 않게 됐는데 시대가 역행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증언하는 장면들이 언론에 등장한다. 재판정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집회장에서, 그리고 설교단에서조차 말이다. 다시 말한다. 부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증언하지 말라. 진실만을 말하라.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