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복음의 빛을… 美·日·中서 선교사 파송 준비

입력 2025-02-18 03:08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회관에서는 한인 유학생 400여명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사진은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들. 국민일보DB

2월의 한국교회 역사는 역사적인 사건을 위해 준비하는 달이었다. 1885년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내한하기 전 미국과 일본, 중국에서는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미국 북장로회가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논의한 것은 1883년이다.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들은 본부에 편지를 보내 한국에 선교사 파송 가능성을 논의했다. 특히 한국인 유학자였다가 세례를 받은 이수정의 사례는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 여러 차례 보고됐다. 1884년 중국에서는 로스 선교사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후서’를 번역했다. 이듬해 1885년 2월 이수정은 일본에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출간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도착했다. 3·1운동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는 한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897년 2월 2일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가 창간됐다.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발행인이었으며 주간으로 발행되는 한글신문이었다. 신문은 당시 세계 정세와 국내 소식, 연환회(연회) 소식을 싣는 한편 성경해설과 논설 등을 게재했다. 또 기독교 교리의 보급뿐 아니라 “혼암한 마음을 광명케 하고 개명에 진보”케 하며 “제 나라이 왕성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제 자녀에게 제가 받은 학문보다 나은 것을 주려”는 사회 계몽에도 목적을 두었다.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가 발행한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은 두 달 후인 1897년 4월 8일 발행됐다.

1987년 2월 3일 한신대 교수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2월 7일엔 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가 고문 근절 촉구 성명을 발표했으며 2월 9일엔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1951년 2월 7일 육군 군목제도가 시작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캐럴 신부와 미 감리교 쇼우 목사는 미8군과 교섭,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 군종과장 이반 베넷 군목과 존 단 신부를 만나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에 종사할 것을 논의했다. 1950년 9월 18일 장로교 감리교 천주교 구세군 성결교 등에서 3인으로 구성된 군목제도 창설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대표로 한경직(장로교) 유형기(감리교) 목사, 정로사(천주교) 신부 등이 선출됐다. 1950년 9월 19일 대표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 군목제도 창설을 건의했다. 이듬해인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 안에 군승과가 설치됐고 2월 28일 32명의 목사와 신부가 지원 입대하면서 발족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유학생 김도연 백관수 최팔용 등 400여명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를 일본 정부와 각국 공관,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1942년 2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교 애국기헌납기성회가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1대와 기관총 7정 대금을 헌납했다. 앞서 2월 1일엔 조선신궁에서 기독교 불교 등이 연합대회를 개최했다. 2월 13일에는 감리교 통리자 정춘수가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 교회 종 헌납을 지시했다.

지난 2004년 2월 12일 이란 밤시에서 열린 지진 피해 주민을 위한 '희망의 집' 착공식 모습. 국민일보DB

2004년 2월 12일 한국교회와 기독 NGO가 이란 밤시에 희망의집 50채 건립을 착공했다. 2003년 12월 이란 남동부 케르만주 밤시에 규모 6.3의 강진이 발생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국내 구호단체들과 교회가 연합해 지원했다.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 신간회를 창립했다.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항일활동 추진이 목표였던 신간회는 YMCA 운동가인 이상재가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78세의 나이에 초대회장을 수락했고 그를 도와 조병옥이 활동했다. 조병옥은 영명학교와 숭실학교 출신으로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YMCA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신간회에 참여한 기독교 측 인사에는 3·1운동 민족대표로 서명했던 박동완 이갑성 조만식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2월 15일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 OG 마시는 필수요원만 제외하고 선교사 철수를 권고했다. 2월 20일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도 선교사들에게 즉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선교사들의 철수는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 영국과 마찰을 빚었고 이 여파로 일제와 영미권 선교사들의 관계가 악화했다. 또 일제가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면서 신사참배를 학교와 교회 등 한국 사회 전체에 공식화하자 선교사들과의 갈등은 더 악화됐다. 1940년 10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일본이 추축국 연합을 구성하자 미 국무부는 1940년 10월 동아시아 지역 대다수 미국인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2002년 2월 18일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일본의 메이지 신사를 참배해 일본 복음주의동맹 등 일본 교계가 강력히 규탄했다. 이 여파로 국내 교계도 규탄 성명을 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은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부시 대통령이 명백한 우상숭배를 했다”고 지적했다.

1918년 2월 26일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됐다. 교파를 초월해 ‘하나 된 교회’를 설립하려는 취지로 설립됐으며 장로교 김필수 목사가 회장에 선출됐다. 협의회는 장·감 두 교회의 존재를 전제로 구성됐으며 교회의 신경과 정치, 예배 모범 등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친목과 협력을 위한 협의체 성격이 강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미감리회, 남감리회 등 3개 교단 대표들이 참여했다. 협의회는 당시 장·감 연합기구로 1905년 창립된 ‘재한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선교사들만의 협의체였기에 한국인을 포함한 협의회를 결성한 것이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