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일 취임 한 달을 맞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폭탄’의 밑그림이 되는 각종 행정명령과 각서 등을 쏟아내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사문화 위기에 놓였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FTA는 체결국 간의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관세나 무역 장벽을 철폐하는 국제 협정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무역 파트너를 상대로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천명하면서 사실상 FTA를 무력화하는 수순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16일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시절 이뤄진 한·미 FTA 개정을 자신의 치적으로 언급했지만, 이후 한국과의 무역적자는 더 늘어난 상황”이라며 “이번엔 FTA를 아예 건너뛰기 위해 상호관세 같은 더 크고 강력한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은 무역적자 문제를 거론하며 2017년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했다. 이듬해에도 철강(25%)과 한국산 세탁기·태양광 패널(30~50%) 등에 대한 관세 방침과 함께 한국을 비롯한 주요 교역국에 ‘호혜세(reciprocal tax)’를 부과하겠다고 나섰다. 한미 양국은 협상 끝에 2019년 한국산 픽업트럭(화물차)에 대한 대미 관세 철폐 시기를 2021년에서 2041년으로 늦추고, 철강은 대미 수출 쿼터제(수입 할당)를 수용하는 내용의 FTA 개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개정 후에도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2020년 166억 달러에서 지난해 557억 달러로 4년 새 3배 이상 뛰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미국 우선 무역정책’ 대통령 각서에 서명하며 1기보다 더 강력한 통상 압박에 돌입한 상태다. 이 각서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기존의 무역 협정 등을 검토하고 FTA 체결국과 ‘상호 호혜적’인 개정안을 권고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 불리한 FTA는 재협상이나 상호관세 부과 등의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3일에도 ‘상호 호혜적 무역과 관세’ 각서에 서명하며 “상대국의 관세 외에도 비관세 무역 장벽 등 다양한 요소를 상호관세 부과 결정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각종 각서에 따라 오는 4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될 연방기관 보고서는 추가 관세 등 다양한 무역 조치를 발동하는 근거로 활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품목별 관세 부과를 위한 ‘긴급 수입제한 조치(세이프 가드)’나 국가안보 위협 등을 이유로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 카드를 재차 꺼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무차별적 관세 방침에 대응에 나선 해외 주요국 사례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한국보다 대미 무역 흑자 폭이 큰 일본은 최근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 내 투자와 LNG 수입 확대를 공식화하며 철강 관세 예외를 요청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지난 13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미 교역량을 2030년까지 두 배 이상 늘리겠다고 했다. 장 원장은 “처음엔 예외가 없다고 해놓고는 개별 협상을 통해 예외를 인정해 주는 것이 트럼프식 협상 스타일”이라며 “관세 소식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타국 상황을 지켜보며 추후 한국 정부의 시간이 왔을 때 총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다”고 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