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무를 길러보지 않아서 사과나무와 배나무를 구별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열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7~18절)
이 말씀은 식물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저도 알고 있는 진리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헬라어 칼로스는 ‘아름다운’ ‘진실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는 어떤 것일까요.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는 사순절 마지막 기간인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가사 중에 4절이 유달리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십자가 고난을 노래하는 찬송인데 그분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그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보기에는 아름답다고만 할 순 없습니다. 번역가는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우리 말 ‘아름다움’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아는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알다의 명사형 ‘앎’에 ‘다음’이 붙어 ‘알음다움’이 되고 이것이 아름다움으로 발전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뜻은 삶의 진실과 진리와 참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앓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앓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앓음’에 ‘다음’이 붙으면 ‘앓음다움’이 됩니다. 인생의 쓴맛과 매운맛을 경험하고 상실의 슬픔과 통증을 앓아 본 사람, 혼돈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고 번민하고 갈등해 본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실수나 욕심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소외되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한 고통의 자리에서 함께 앓는 사람의 앓음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셋째 ‘안는 것’을 말합니다. ‘안다’의 명사형 ‘안음’에 ‘다음’이 붙으면 ‘안음다음’이 됩니다. 우리말 ‘아름’의 뜻은 ‘두 팔 벌려 껴안은 둘레의 길이나 물건의 양’입니다. 여러분이 껴안을 수 있는 양은 얼마나 되십니까. 외면하는 것보다는 안아주는 것, 따돌리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것, 배척하기보다 포옹하는 게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음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는 사람들까지 힘껏 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 이 아름다움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실체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부활이란 이 아름다움의 승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모두가 한 형제라는 앎이 있습니까. 그 앎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통을 함께 나누는 앓음이 있습니까.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용납하는 안아줌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실에 대한 앎과 실천, 그리고 함께 앓음과 뜨거운 안음이 열매로 맺히길 소망합니다. 십자가 예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나의 아름다운 신앙 열매를 맺어가는 사순절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대준 목사(능동교회)
◇능동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입니다. 능동교회는 사람을 인도해 교회에 소속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숙에 이르도록 양육하며 교회에서 사역하고 세상에서 선교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