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질서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 영토 팽창주의를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강대국들이 선을 그어 분할·점령했던 19세기 제국주의는 수많은 지정학적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지금의 국제질서 변동은 다시 한번 제국주의적 팽창주의 조짐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립주의적 대외정책을 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마가(MAGA) 깃발 아래 추구하는 ‘미국의 황금시대’는 잭슨주의 및 먼로 독트린과 겹친다. 미국의 이익에 직접 연관이 없는 국제문제에서는 한 발 빼는 역외 균형과 동시에 이익은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다. 특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주축이었던 미국이 ‘악의 축’이었던 러시아와 함께 강대국 제국주의 행태를 보이는 건 당혹스럽다. 트럼프는 지난해 말부터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매입하고, 파나마운하 운영권도 회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필요하다면 군사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펜타닐 마약과 불법이민 통제를 빌미로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관세를 부과했고, 캐나다에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는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도 못지않다. 2007년 에스토니아를 상대로 한 사이버 공격,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반도 병합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세력권 방어라는 미명하에 무력행사를 정당화했다.
가자지구 구상도 놀라운 발상이다. 트럼프는 200만명에 달하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이집트와 요르단 등으로 강제 소개하고, 그곳을 미국이 접수해 중동의 리비에라로 개발하겠다고 제시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에는 팔레스타인 주민을 받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트럼프의 압박에 요르단은 반대하던 입장을 바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집트에서는 전쟁의 불씨가 번져오는 것은 물론 장차 이집트가 하마스의 거점이 될 가능성에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국제사회가 중동 평화 방안으로 지지해 온 ‘두 국가 해법’도 사실상 물건너 간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예는 우크라이나 종전 문제다.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즉각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상태로 전쟁이 종결되면 우크라이나 영토의 20%가량이 러시아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는 배제된 채 이뤄진 결정이라는 점이다. 1938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독일에 떼주는 ‘뮌헨 협정’을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제한 채 체결한 것이 떠오른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배제된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런 종전안은 사실상 푸틴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국의 영토주권을 무시한 채 침공, 병합해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깨도 아무런 제동도 걸 수 없는 무력함이 앞으로 펼쳐질 국제질서의 방향을 시사하는 것 같다.
만일 대만이나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해도 그 해결을 강대국들의 자의적 협상에 맡겨야 할 것인가. 앞으로 펼쳐질 국제질서가 과거 제국주의 시대 팽창주의로의 회귀라면 대륙과 해양으로부터 침탈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우리는 안보와 번영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각자도생의 정글 속에서 안보와 번영을 지킬 전략을 세우는 게 한시가 급한데, 우리는 정치의 혼란과 정쟁 속에 길을 잃은 채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내우외환에 정부와 정치권은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나.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