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초반에 담임 목회를 시작해 지방 소도시에서 성도 40명 출석 교회를 1000명으로 부흥시킨 사람. 결론만 놓고 보면 어려움 없이 성공한 목회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모범적인 성도 2명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부교역자와 친구의 자녀가 갑작스럽게 숨지는 걸 지켜보는 등 어두운 터널을 걸어야 했다. 교회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 때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사건에 개의치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킨 성도 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경북 김천의 은혜드림교회에서 최근 만난 최인선(53) 목사는 “우리 교회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닌 주어진 오늘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네버엔딩 스토리”라고 강조했다.
2009년 연달아 찾아온 불운의 역설
최 목사와 교회가 세상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 연달아 맞은 불운 때문이었다. 최 목사는 그해 6월 성도 4명과 함께 자전거 라이딩을 하다가 경찰이 몬 음주 차량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모범적이던 성도 2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불행은 어깨동무하고 온다’는 말처럼 최 목사는 그해 안타까운 죽음을 2번 더 겪었다. 10년간 동역하던 부목사의 자녀가 용혈성요독증후군(일명 햄버거병)으로 투병 4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친구의 자녀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교회와 최 목사에게 닥친 불행은 ‘교회가 사분오열됐다’거나 ‘망했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교회는 이후 더 단단해졌다. 최 목사는 “사고를 당한 성도님들이 거의 곧바로 교회에서의 자기 자리를 찾아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됐고, 그런 모습을 보고 힘내지 않을 수 없었다”며 “직간접적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모든 성도가 서로 다른 표현과 위로로 목사인 나를 보호해 주었다”고 했다.
최 목사는 사고 10여년 후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간증했다. 이후 새로 온 성도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교회의 이야기는 2021년 한 간증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최 목사는 “우리 교회가 겪은 상처와 아픔은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건이지만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씀에 대한 흔적이기도 하다”고 했다.
40명 고향교회서 ‘오직 말씀으로’
최 목사는 작은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김천의 명문고에서 공부를 꽤 잘했던 그는 서울 명문대 유학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목회자가 꿈이었지만, 바로 신학대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부친의 병환으로 계획은 틀어졌다. 신학대에서 난데없이 공황장애를 겪었다. 1990년대엔 흔치 않았던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였다. 땅바닥에 누워 ‘그냥 목사만 되게 해달라’고 처절하게 기도했고 치유를 경험했다. 최 목사는 “지나고 보니 교만이라는 불순물을 빼는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의 여러 대형교회에서 교역자로 일하며 ‘도시 목회’의 꿈을 부풀렸다. 그런데 부친이 고향의 개척 교회를 맡아주길 바랐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온 때가 31살 무렵이었다. 어르신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새파랗게 어린 목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설교 준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 목사는 “성도님에 대한 존중감의 표현이었다”고 했다. 6개월 전 설교 준비를 마치는 그때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최 목사는 “오래전에 준비한 설교엔 사사로운 감정이 사라지고 순결성이 생긴다”며 “이렇게 묵힌 설교가 현재와 상황과 맞아 떨어져 은혜가 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고 했다.
오전 5시30분 새벽기도와 함께 일과를 시작하는 것도 최 목사의 오랫동안 유지해 온 일상이다. 다른 지역 집회에 초청됐다가 자정 넘어 새벽에 돌아올 때도 이 원칙은 깨지 않는다. 최 목사는 “다른 성도님에게 갈비를 먹이고, 우리 성도님에게 죽을 먹일 순 없지 않냐”고 웃었다.
소도시서 1000명 “꿈·희망 주고파”
2002년 상가 건물 3층에서 40여명이 예배드리던 교회는 현재 번듯한 단독 건물에서 1000명이 모이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위치와 성도 규모가 변했지만, 최 목사는 여전히 예배만으로 성장과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추억’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1년에 1~2차례 일상이 시작되기 전 교회에 들러 예배드리고 아침을 나누는 ‘기도하고 밥 먹고 학교(회사) 가자’를 전통처럼 연다. 온 가족이 일주일간 교회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뷔페식으로 마련된 아침 식사를 한다. 최근 열린 1박2일 학생 수련회에도 부모가 다양한 봉사로 함께 참여해 추억을 쌓았다. 최 목사는 “학창 시절 교회에서의 행복한 장면이 인생을 살며 찾아오는 어두운 시절에도 소환돼 힘이 된다”고 했다.
부임 초기부터 현재까지 인근 보육원 아이들을 성도로 맞았다. 아이 한 명을 가정과 엮은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최 목사는 “그 아이가 성도님 가정을 통해 부모 역할을 조금이라도 경험했으면 좋겠다”며 “한 아이는 교회의 찬양리더로 서면서 교회 청년과 결혼했고 장학사, 방사선사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최 목사는 ‘역사의 동반자’인 교역자, 성도와 함께 정답이 정해지지 않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공동체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김천=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