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저 책 기웃거리다 보면 이 문장을 종종 만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사회적 맥락이 겹쳐 있기에 그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정치적 중심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어떨까. ‘개인적인 것이 신학적인 것이다.’ 이 명제가 참이 되는 신학, 즉 추상적이고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긍정하며 삶에 깊이 뿌리내리는 신학이 가능할까. 이 책 앞에서는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저자 김혜령 교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아버지와 합가한 딸이다.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펼쳐지는 생생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한다. 또한 그는 신학자다. 일상과 약해짐, 노년과 질병, 돌봄….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신학적 해석을 펼친다. “약해진 자와 흔들리는 생명 활동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의 힘이 인간의 언어로 해석되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신학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약해진 자들’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있어서다.
다시 말해 책은 정처 없이 밖을 배회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들을 더는 기억하지 못하고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아버지를, 신학의 언어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저자는 폴 리쾨르와 피에르 부르디외 등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를 경유하며 해석학적 작업을 해 나간다. 그는 단언한다. “현대 신학의 존재론과 신론 위에서 치매 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저주받거나 열등한 존재로 해석될 수 없다.”
한편 이런 질문도 던져 볼 수 있다. ‘실제 삶에서 신학이 무슨 소용인가. 다른 해석이 왜 필요한가.’ 복음서에 나온 이야기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으며 모든 게 끝났다고 단정한다.(막 5:38) 이들에게 예수는 뜻밖의 말을 한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에게 여전히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펼친 것이다. 아이가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 가장 선행돼야 하는 건 다른 해석이었다.
약해진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는 이 작업을 사력을 다해 수행한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된다. 신학의 궁극은 사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