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연재물… 부고 쓰기를 통해
죽음은 ‘나의 일’이 되었다
연재물… 부고 쓰기를 통해
죽음은 ‘나의 일’이 되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몇 해를 혈액암으로 투병하셨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농담을 잘 하시던 멋쟁이 아버님이셨지만 말년에 대부분 집에서 누워 계셨다. 아버님은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목소리가 크셨는데 “다정이 잘 다녀왔느냐”고 안부를 물으시던 인자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집안에 울려 퍼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의 마지막에는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패혈증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몇 년 동안 편찮으셨는데도 막상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가족 모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버님의 죽음을 생각하고만 있었기에 생각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죄송스럽게도 아버님 영정사진조차 준비가 안 되어 부랴부랴 옛 사진을 뒤지기까지 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의 중에 양해를 구하고 회사를 나섰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학교에 전화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초등학교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모습을 바로 보여줘도 되는지를 상담선생님과 논의하기도 했다. 장례까지도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나는 올해, 부고를 쓰는 워크숍에 참여해 죽음을 생각하며 새해를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의 부고를 쓰는 자리였다. 75세, 80세 정다정이라니. 낯설지만 곧 맞이할 나의 미래였다. 죽음을 앞둔 나를 상상하니 나의 현재와 미래는 과거가 되었다. 부고를 쓴다는 것은 나의 앞으로의 20년, 30년을 상상하는 작업이었다. ‘건강할 때 유언장을 쓴 이유’의 저자 김호 작가는 부고는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최고의 액션플랜이라고 했다. 그는 인생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쓰는 부고는 오히려 지금 현재에서 내가 인생의 중요한 우선순위를 다시 돌아보고 재정비할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따라서 부고는 완결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하는 연재물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뜬금없이 눈물이 나왔다. 고마운 건 참 많은데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서 또 눈물을 흘렸다. 부고를 쓰며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이기에 밀도 있게 함께하는 시간을 더 늘여야지. 또 하나, 나는 일을 참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다들 부고를 쓰면서 일이 부질없다, 남는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소중한 친구와 가족만큼 일이 중요했다. 부고 쓰기는 지금 내가 전심을 다해 투자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앞으로의 20년을, 30년을 ‘자라고 싶은’ 어른이었다.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망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한 달 동안 매주 한 번 모여서 서로의 부고를 쓰고 마지막 날은 자신의 부고를 읽었다. 매시간 썼던 부고를 다 뒤집고 새로 쓴 친구도 있었다.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줬으면 하는 음악을 골라 리스트로 만든 친구도 있었다. 그녀가 선곡한 토이의 ‘뜨거운 안녕’의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이란 가사를 들으며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줄 몰랐다며 함께 울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벗어나 새롭게 발걸음을 내딛으려고 용기 낸 친구는, 용기 내서 전진한 이후의 삶을 상상하며 부고를 낭독했다. 낯선 이들은 부고 쓰기를 통해 죽음을 함께 상상해보는 동지가 되었다.
부고 쓰기를 통해 죽음은 ‘남의 일’에서 ‘나의 일’이 되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상상을 해봤다. 편안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덕담을 나누고 웃으면서 돌아가고 싶다. 부고를 쓰며 흘린 눈물을 기억하며, 소중한 이들과의 시간에 더 마음을 쏟아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활짝 웃는 영정사진과 함께 따뜻한 음악이 흐르는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다.
정다정 메타 인스타그램 홍보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