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가난이 가난을 마주하면

입력 2025-02-14 00:33

과거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한 배달 기사가 고급 아파트로 배달을 나갔는데, 도로가 막혀서 도착이 늦어졌다고 한다. 기사가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손님은 오히려 “괜찮다. 고생 많으시다”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팍팍한 시절에 훈훈한 이야기다. 그런데 댓글 대부분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부자 동네라 다행이지, 못사는 동네였으면 벌써 본사에 항의하고 난리났다’ ‘역시 부자 중에는 진상이 없다’ ‘부자 동네 콜만 받고 싶다’…. 배달 지연을 지적하는 것이 과연 진상인지는 모르겠다만, 가난을 둘러싼 대중의 혐오감이 극에 달한 건 확실히 알았다.

강남의 한 아파트 상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자영업자의 글도 흥미를 끌었다. 그는 부자의 특징 몇 개를 꼽았다. 무례한 사람이 없고, 피부가 좋고 머리가 단정하며, 뚱뚱하거나 통통한 사람을 찾기 어렵고,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것. 이 글 역시 많은 공감을 받았는데, 나열된 긍정적인 형용사를 180도 뒤흔들면 그대로 빈자의 특성이 될 것이다. 굳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은 아니다. 부의 격차가 불러온 일상 풍경이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대놓고 빈부를 나누고 비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유한 재물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걸 경계하던 때였다. 우리 조상들은 ‘돈은 원래 천한 것’이라는 뜻의 전본분토(錢本糞土)나 은은한 비하의 뜻을 담은 졸부(벼락부자) 같은 말을 써 왔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국충절이나 청렴, 신의와 효도,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부자를 향한 전폭적인 찬사가 사회 전반에서 공공연하게 발화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젊은 세대는 대기업 총수를 ‘형’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한다. 수십년간 사용자보다는 노동자 편에 서 왔던 그 젊은이들이 달라진 거다. 가난한 주인공이 자수성가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구식이 됐다. 대신 잘생기고 예쁜 데다 돈까지 많은 재벌이나 부자들이 스크린을 점령했다. 부자가 되는 법을 다룬 강의나 책이 쏟아지고, 그들이 사고 입고 먹는 것들은 부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 대기업 회장이 자주 찾는다는 비싼 맛집 등등. 그렇게 우리는 완벽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돈 많은 이를 부러워하고, 더 노력해서 그들처럼 되겠다는 다짐은 좋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동기부여도 된다. 다만 부자를 향한 선망이 커지는 만큼 빈자를 향한 맹목적인 비난과 혐오도 깊어지는 게 문제다. 게으르고, 의지가 없고,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사회를 향한 분노가 가득한 시한폭탄 같은 존재. 인터넷과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 중인 빈자 담론은 돈 없는 사람들을 인간 같지 않은 집단으로 몰아간다. 가난의 과정과 배경, 원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결과만 따진다.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덮어 씌운다.

그러니 부자가 아닌 이들은 스스로 그 안에서 계층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욕하며 구별지으려는 애처로운 자폭쇼가 펼쳐지는 것이다. 서로가 조금만 배려하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배달 실랑이도 비수 같은 막말과 혐오로 귀결되는 것처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는 4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0.9%뿐이다. 나머지 99.1%의 사람들이 서로 벌이는 감정 싸움은 점점 더 격해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는 사람조차 매년 줄고 있는데, 일부 불법 혹은 부도덕한 방식으로 부자가 된 이들만 강건너에서 웃으며 불구경을 하는 듯 하여 마음이 무겁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