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면 음악방송 DJ들이 곧잘 내 엽서를 읽어주곤 했다. ‘황인용의 영팝스’에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요즘 니나 부슈만에 빠져 있다는 사연을 보냈더니 황인용 DJ가 정성스럽게 읽어주었고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는 조지훈의 ‘승무’를 패러디한 시를 보냈더니 이종환 DJ가 배경음악까지 넣어서 멋지게 낭독을 해주었다. 다음 날 학교 친구들은 그런 나를 걱정했다. “성준아, 고3이면 공부를 해야지. 그딴 거 써서 보낼 시간에 문제집을 풀어라.” 그러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대학 입학 후 ‘뚜라미’라는 노래동아리에 들어갔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다음날이면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서클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나에게는 일종의 ‘해장’이었는데 어느 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서클실 문을 두드리며 “아침부터 그렇게 소릴 질러. 수업 안 들어가?”라며 혀를 찼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베짱이처럼 노래나 부르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이나 잡지를 읽고 있으면 영문과 친구들(놀랍게도 나는 영문과를 다녔다)도 지나가다 “성준이는 참 속도 편하지”라며 웃었다. 뒤이어 요즘 취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는 애정 어린 관심이 쏟아졌다.
광고회사에서 일할 땐 ‘정무감각’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윗사람들에게 좀 고분고분하고 잘 보이면 회사 생활도 편하고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왜 그러질 못하냐는 걱정이 들려왔다. 돌아보면 나는 경영진과는 데면데면한 관계였고 동료나 후배들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한 번은 내가 쓴 카피가 메인 메시지가 되어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승리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본 광고를 제작할 때 나에겐 다른 일이 주어졌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장님이 그 건을 다른 카피라이터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나 대신 카피라이팅을 맡은 후배가 “형, 이건 형이 한 거잖아”라며 당황했지만 나는 사장님에게 항의할 용기도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때 ‘내 밥그릇’을 사수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선배 부부와 술을 마시던 날 술자리에 늦게 온 여성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몇 번 만나보니 좋은 사람이긴 한데 뭔가 안 맞는 것이었다.
헤어지겠다고 했더니 선배는 “좀 아쉬운 점이 있어도 그냥 만나라. 안 예뻐서? 그런 너는 잘 생겼냐? 나이를 생각해야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주제를 모르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옳으냐 그르냐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였다. 만약 선배 말대로 쭉 사귀다 결혼하면 둘 다 불행할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다가 마흔 살이 훨씬 지나 아내를 만났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카피라이터로 유명하지 않았고 책을 내본 적도 없었다. 함께 프로덕션에서 일했던 아트디렉터 출신 실장님은 “책을 내서 생활하신다고요…. 그게 될까요?”라며 조심스럽게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무턱대고 사표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첫 책이 열흘 만에 2쇄를 찍었고 이후로 나는 작가로 활동하며 글쓰기와 책 쓰기 강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J K 롤링이 ‘해리 포터’ 원고를 가져갔을 때 출판업계에서는 “아이들이 이렇게 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출간을 반대했다고 한다. 밥 딜런이 포크 음악계의 전통을 거스르고 일렉트릭 기타를 도입했을 때도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그러면 안 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음악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시대의 정신을 담은 가사와 독창적인 스타일로 음악계에 혁신을 불러왔다.
물론 내가 롤링이나 딜런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안다. 다만 살면서 “그러면 안 돼”라는 소리를 백 번도 넘게 들었는데 그 말을 따르지 않아도 큰일 나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사실 내 삶에 큰 관심도 없으면서 관성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보령으로 이사를 올 때도 사람들이 묻는 것은 ‘아무 연고도 이유도 없이 보령엔 왜 가느냐’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마음이 시켜서 그런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러게요. 저희가 미쳤죠”라며 웃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되는지 안 되는지 한 번 해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