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다.’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향하는 남편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에게 보낸 편지에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괴테의 문장을 쓴다. 이것은 라즐로의 앞날을 두고두고 표현하는 한 문장이 된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라즐로는 미국에서 새 삶을 도모한다. 하지만 헝가리의 이름난 건축가였던 그는 먹을 것과 살 곳, 일자리를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전쟁과 홀로코스트가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은 무엇보다 그의 영혼이다. 불안과 공포, 분노는 라즐로를 끊임없이 잠식한다.
필라델피아의 갑부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라즐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역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을 건넨다. 라즐로의 대담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보다 반대에 부딪힌다. 사람들은 그의 설계보다 출신과 종교를 트집 잡고, 해리슨의 가족을 비롯한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모욕을 준다.
라즐로는 삶이 힘들수록 예술에 집착한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유학한 기자 출신 에르제벳은 가난한 이민자라고 무시당하는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이민자의 나라’로 도망쳐 온 그들 앞에 놓인 건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과 멸시다.
영화의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1950~70년대 유행했던 건축 양식인 브루탈리즘에서 따 왔다. 브루탈리즘 양식은 외장 없이 노출된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기하학적인 구조를 조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라즐로가 해리슨의 의뢰로 지은 건축물이 바로 이 양식을 따른 것이다.
라즐로의 고통과 연결된 건축 설계를 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20m 높이의 천장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고 일정한 크기의 방들은 그가 갇혀있던 수용소를 본딴 것이다.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을 통해 관객들은 역사가 남긴 아픈 상처를 확인한다. 냉혹한 현실과 천박한 자본주의, 인간의 비열한 민낯을 돌아보게 된다.
‘피아니스트’(2003)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유대인 작곡가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을 연기해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애드리언 브로디는 이번에도 압도적인 열연을 펼친다. 이 영화로 이미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그는 다음 달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내 건축물은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침식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그의 말처럼 라즐로는 미국인들의 착취와 폭력, 오만에 맞선다. 라즐로는 역사의 피해자로서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고, 애드리언 브로디는 라즐로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하나의 대서사시를 완성한다.
215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15분의 휴식시간을 포함한다. 서막과 1막이 끝난 후 인터미션이 진행되고, 2막이 이어진 뒤 에필로그로 끝난다. 인터미션도 영화 구성의 일부로 감상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조명이 완전히 켜지지 않는다. 상영 중 인터미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부터 수상 행렬을 시작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서도 작품상을 비롯한 10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다. 12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