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안 보인다? 그때가 축복의 시간! 광야에서 나의 길을 내자

입력 2025-02-13 03:07
게티이미지뱅크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색소폰을 멋지게 불던 미남 배우 차인표가 삶의 필모그래피를 한 겹 한 겹 쌓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기독 NGO와 함께 지구촌 곳곳의 난민 자원봉사도 자주 다니고 기부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그가 쓴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 영국 옥스퍼드대 교재로 채택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설가 차인표로 세상에 각인을 찍고 있다. 고 이어령 교수는 위안부를 소재로 쓴 이 소설이 “배우 차인표가 아닌 작가 차인표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역작”이라고 극찬했다.

차인표는 지난해 교보문고가 마련한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가장 가난하고 힘들었던 대학생 때가 지금 돌이켜 보니 가장 축복받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14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를 따라 21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광야를 걷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식당 웨이터, 간호보조원, 페인트칠,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일하고 공부하면서 내일이 있을지 불안하고 힘들었단다.

그때 현장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절박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8개월 동안 백수로 지내다 방송국 탤런트 시험에 두 차례 실패 후 세 번째 방송국 탤런트 공채에 도전해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불편하고 힘들 때 성장한다. 실패는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지만 포기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포기의 반대말은 도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고 했다.

꿈을 강요당하는 시대

청춘, 두 글자에는 민태원이 ‘청춘예찬’에서 노래한 것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다. 젊음은 눈이 부시게 빛나고 싱그럽다. 그러나 그때는 소중함을 잘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세상이 만든 모범 답안대로 레일 위를 따라 걸어왔다. 헬리콥터 맘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이제는 스스로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대학 담장을 나서는 것도 두렵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정글 같은 사회로 어떻게 나가야 할까. 취업도, 결혼도 어려우니 가능하면 늦추고 나만의 동굴 속으로 숨고 싶다.

1979년 발매된 핑크 플로이드의 11번째 스튜디오 앨범 ‘더 월(The Wall)’에 수록된 ‘어너더 브릭 인 더 월(Another Brick In The Wall) 파트2’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레일 위를 줄지어 걸어간다. 어느 순간 그들의 두 눈과 귀와 입은 뻥 뚫려 있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무표정하게 줄지어 걸어가던 학생들은 레일 끝에서 고기 분쇄기에 한 명씩 뚝 떨어져 소시지로 변해 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교육도 필요 없고, 사고를 통제하는 것도 필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벽을 쌓는 또 다른 벽돌일 뿐이다.” 획일적 교육 시스템이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 가사다.

우리 시대는 너의 꿈을 꾸지 말고 내가 원하는 꿈을 강요하며 정형화된 틀에 맞춰 살라고 한다. 세상 잣대로 재단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낙오자라고 낙인찍는다. 그러나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궤도를 벗어나도 괜찮다. 돌아가도, 그래도 괜찮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순백의 인생 도화지를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더디게 가더라도 각자의 꿈과 삶은 소중하다.

광야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곳

지난해 말 개봉한 심바의 아버지 얘기를 다룬 영화 ‘무파사 : 라이온 킹’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길을 잃은 곳에서 길을 찾는다.” 가장 달리기를 잘하는 어린 무파사가 갑작스러운 대홍수로 엄마 아빠 사자와 헤어지면서 홀로 남게 된다. 지금까지는 엄마 아빠를 따라왔지만 이제는 혼자 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 광야를 홀로 걸어가는 듯 아무런 빛도 안 보일 때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심연으로 들어가 벌거숭이 마음을 들여다보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빛나고 길을 찾게 된다.

성경 속에도 목표를 잃고 방황하다가 새로운 목표를 찾아 나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을 죽이고 이세벨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도망쳤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음을 간청하며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고 했다.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 왕이 다스리는 유다 지역이었기에 안전했다.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데 대한 불만과 영적 곤비함도 있었다고 신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주며 그를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요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가 큰 풍랑을 만난다. 배타적 선민의식이 강해 이방인을 경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에 대해 반감의식이 있었고 요나 역시 앗수르가 징벌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는 바다에 던져져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 요나는 하나님께 회개하며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내게 하셨고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향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사울도 마찬가지다. 그는 회심 후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좌표를 잃고 헤맬 때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다. 조바심은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영혼을 좀먹는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신다. 형제들에게 쫓겨나 광야를 헤매는 요셉에게 하나님은 찬란한 미래를 꿈으로 보여주셨다. 존 비비어는 책 ‘광야에서’에서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큰 유익이다.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겸손하게 만들며 강하게 단련시키는 곳이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과 갈증을 얻게 된다”고 했다.

세상 기준 아닌 하나님 음성 따라가야

삶은 고통스럽다. 인생은 뻥 뚫린 8차선 탄탄대로가 아니다. 가시밭길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암초에 부딪혀 쓰러진다.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더 편리해졌지만 곳곳에 지뢰가 놓였다. 문명의 이기는 호시탐탐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하루의 안녕을 기도하고 잠들기 전에 하루를 잘 살아냈음을 감사하는 시대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있기에 넘어져도, 길을 잃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깜깜한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 울퉁불퉁 가시밭길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업고 맨발로 피 흘리며 가시밭길을 함께 걷고 광야를 함께 걸어가신다. 그렇기에 고통의 무게도 덜한 것이리라.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그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못하는 것을 구분해 보자. 세상의 시간표에 맞출 필요는 없다. 관음증에 중독된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두자. 남의 시선이나 세간의 평판은 무시해도 된다. 우리가 좌절하고 낙담하는 대부분 원인은 세상의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슬로우 영성’의 저자 존 마크 코머는 서른세 살 한창나이에 급성장하고 주목받던 대형 멀티사이트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내려놓고 파격적 선택을 한다. 교회 하나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한 번에 하나의 교회를 이끌고 싶다는 선택을 했다. “내 꿈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중심으로 내 삶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한 그는 10년간 달려온 질주를 멈추고 가족과 함께 안식년을 갖고 일하는 시간을 줄였다. TV 중독을 치료하고 고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잠자기 전 개와 산책을 한다. 일에서, 사람에서, 이메일에서 점점 해독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그랬더니 하나님이 다시 느껴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삶의 정답은 없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햇빛 가득하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종착역에 닿게 되지 않을까.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