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회화일까. 입체일까.
분명 캔버스인데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끈이 생겨나 서로 묶여 있다. 묶은 매듭에는 또 다른 캔버스 천에서 잘라낸 끈을 더해서 묶었는데, 덕분에 매듭은 풍성해져 식물이 번식하는 듯하다. 어떤 작품은 매듭지어진 캔버스 천이 2개 층으로 되어 있어 지층 밑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평면이라기보다는 입체 작품을 보는 기분을 강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원래 캔버스 천에 칠해졌던 추상화의 느낌을 여전히 간직해 회화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독특한 회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신성희(1948∼2009) 작가의 개인전 ‘신성희 : 꾸띠아주, 누아주’를 한다. 신성희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며 끝까지 ‘회화를 넘어선 회화를 추구한 디아스포라’ 작가다. 꾸띠아주와 누아주가 그렇다. 꾸띠아주는 불어로 ‘박음질 회화’, 누아주는 ‘엮음 회화’를 뜻한다.
우선 시선을 강탈하는 것은 캔버스를 잘라서 띠처럼 만든 뒤 이걸 서로 매듭짓고 엮는 방식의 엮음 회화다. 이 연작을 하기 전에는 박음질 회화를 했다. 이것은 채색한 캔버스를 일정한 크기의 띠로 재단하고 재봉틀로 박음질하는 방법을 쓴다.
갤러리현대는 2019년 개인전에서는 박음질 회화 위주로 선보여 회화성을 내세웠다. 이번에는 엮음 회화 연작을 대거 선보이며 입체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엮음 회화에서 나아가 캔버스 천을 잘라낸 띠를 엮어 완전한 입체로 만든 작품도 나왔다. 입체 작품 꼭대기에는 작가가 사용한 실제 붓이 매달려 있어 마치 회화를 상징하는 붓끝에서 입체가 흘러내리는 거 같아 회화의 변신을 궁극까지 추구한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신성희는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성좌를 만들지 못한 외로운 별이었다. 197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시대적 흐름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이건용, 성능경, 이강소 등 당시 홍익대 출신 선배들이 주축이 돼 회화도 조각도 아닌 퍼포먼스, 대지미술 등 이른바 실험미술을 할 때 그의 관심은 여전히 회화에 꽂혀있었다. 정확하게는 ‘회화 아닌 회화’였다. 시대의 흐름에서 비껴나 회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국내파인 홍익대 선배 김홍주와 닮아있다.
그는 만 23세이던 1971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공심(空心)’ 3부작으로 특별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창이 난 방에 여인이 누워 있는 그림인데, 창이 점점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여인은 어느새 사라지는 등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다. 신성희가 작가 인생 초기부터 회화를 하면서도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회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기에 그는 마대 위에 극사실적으로 마대를 그리는 ‘마대 회화’(1974∼1982)를 했다.
그는 1980년 돌연 파리로 이주했다.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그곳 파리에서 처음에는 채색한 판지를 붙여 화면을 직조하는 콜라주를 했고, 이어 ‘박음질 회화’, ‘엮음 회화’ 등으로 끊임없이 회화 아닌 회화를 추구하며 변신했다.
그가 나라 밖에 있는 사이, 국내 화단에는 또 다른 흐름이 이어졌다. 198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민중미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게 실험미술도, 민중미술도 아닌 제3의 길을 걸은 디아스포라 작가를 불러낸 것은 갤러리현대 창립자 박명자 회장이다. 파리에 거주하던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의 소개를 받아 1988년 국내 첫 개인전을 열어줬다. 당시 최고의 미술평론가 오광수, 이일이 전시 도록에 글을 썼다. 그렇게 맺어진 갤러리현대와의 인연은 이번 10번째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에는 40여년 회화 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연작들이 모두 나왔다.
갤러리현대는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중 현지에서 신성희 개인전을 열며 국제무대에 본격 데뷔시켰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11일 “미술사적으로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자국과 현지 모두에서 주류로 기록되지 못해 이중배제의 안타까움이 있다”면서 “신성희 작가는 작업 자체가 두 나라 경향을 모두 반영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등 끝까지 회화를 넘어서는 회화를 추구한 점을 재조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해외 아트페어에도 지속적으로 소개해 2023년 12월 마이애미 바젤 아트페어, 지난해 6월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 등에서 판매가 이뤄지는 등 상업적 가능성도 확인되고 있다. 3월 16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