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빨갱이 명단

입력 2025-02-12 00:40

우리말에 특정인이나 집단을 낙인찍는 단어들은 외래어로부터 절묘하게 차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폭력배, 불량배라는 뜻의 깡패는 6·25 전쟁 이후 미군이 들여온 통조림 캔(can)이 변형됐다. 동냥아치(양아치)가 이 캔에 통이란 말이 합성된 깡통을 들고 구걸했는데, 패거리 지어 못된 짓을 하면 깡패라 불렀다. 한 조폭 영화에 폭력배들도 깡패로 불리면 가오가 안 선다며 건달로 불러 달라는 장면이 있다. 건달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르바를 한자로 차용한 건달바(乾達婆)에서 유래했다. 간다르바가 천상의 음악을 맡는 신이라는 고상한 뜻이 있음을 조폭들이 알고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부터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을 뜻했는데 조폭 세계에선 깡패와의 느낌이 천양지차인 모양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친일파’와 함께 고질적인 진영 대립을 보여주는 단어는 ‘빨갱이’가 아닌가 싶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공산주의 비정규군인 partisan이 러시아어로 ‘빠르띠잔’으로 발음돼 빨치산으로 차용한 뒤 빨갱이가 됐다. 영어처럼 ‘파티즌’으로 발음됐다면 ‘파랭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좌우 대립이 극심한 해방 공간에서 나오기 시작한 이 용어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이 정적 척결을 위한 프레임 도구로 악용하면서 본격 확산됐다. 재임 당시 빨갱이 소탕에 앞장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빨갱이 사상 공세를 당했다며 격분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최근 극우 커뮤니티에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정치인과 연예인,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까지 ‘대역죄인(친중·종북 공산당 빨갱이 명단)’ 107명의 이름이 올랐다. 106번째에 오른 최강욱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한강 작가님 덕분에 꼴찌는 면했다”며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결코 별거 아닌 것처럼 넘어갈 일은 아닌 듯하다. 이런 식의 빨갱이 풍자까지 나도는 건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치닫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정치권이 가장 잘 알 듯하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