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휘둘리거나 휘말리거나

입력 2025-02-12 00:38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문상철씨가 2023년 펴낸 ‘몰락의 시간’에는 안희정이 겪은 전락의 스토리가 상세히 담겨 있다. 눈여겨봄 직한 부분은 안희정이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한 2017년, 그즈음의 이야기다. 권력의 봉우리에 가까워지자 그의 주변엔 사이비 언론인이나 정체불명의 로비스트가 꼬였고 역술인과 만나는 일도 많아졌는데 당시 역술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조언을 건넸다고 한다. 나는 당신이 겪은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었다, 대선 후보 경선은 신승으로 끝날 것이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더라도 다음 대선까지는 승리의 기운이 있다…. 그러면서 어떤 색, 어떤 사람, 어떤 방향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희정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문씨는 이렇게 적었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판단보다 역술인들의 솔깃한 조언이 점점 더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 여러 정치 전문가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앞날의 길흉이 주술가들에게는 명확하게 보이는 듯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유혹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합리적인 이성을 제일가는 가치로 여길 듯한 정치권이지만 문씨의 책에서 보듯 정치와 무속은 때론 기묘한 관계를 맺곤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유혹’에 기대는 것, 그것이야말로 통제 불가능한 미래 탓에 걸머지는 불안감을 가장 손쉽게 눅일 방법이니까. 지난 10년 사이 그런 사례가 가장 먼저 표나게 드러난 것은 박근혜정부 때였다. 비선 실세로 불린 최서원(최순실)씨가 무속에 의존했다는 보도가 이어졌고, 대통령이 이런 사람에게 휘둘렸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제정 러시아 말기 엽기적 기행을 일삼으며 권력을 쥐락펴락한 괴승 라스푸틴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실존했다는 식의 평가도 쏟아졌다.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괜찮았겠지만 현 정부 들어서도 대통령이 미신에 휘둘린다는 뉴스는 계속됐다. 지난 연말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구속 수감된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나타나 무속 논란에 불을 댕겼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을 비롯해 국정 현안마다 무속인들이 배후 세력으로 언급되곤 했고 그때마다 기기괴괴한 말을 내뱉는 법사나 도사나 보살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무속만큼이나 한국 정치의 둘레를 강하게 휘감고 있는 것은 엉터리 음모론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일부 야권 성향 지지자들 사이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김어준씨가 내뱉은 말들일 텐데, 그가 제기한 세월호 고의 침몰설이나 18대 대선 개표 부정설 같은 음모론은 공론장을 자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정치 무당 김어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김어준은) 잠재돼 있는 것으로만 알고 넘어가도 좋을 한국인들의 증오와 혐오 본능에 불을 붙임으로써 정치를 선악의 대결 구도로 몰아간 방화범은 아니었을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무속에 휘둘리고 음모에 휘말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뇌의 공백 상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무슨 일이든 인과관계의 틀로 설명할 수 있어야 안심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천구에 무의미하게 붙박인 별들까지 연결해 온갖 별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더하고 신화를 포갠다.

하지만 인생은 온갖 우연이 만드는 요지경 같은 것이다. 요술봉 같은 해설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지도자라면 우선 이토록 자명한 진리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한 이가 국가의 조종간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린 그 결과를 보고 있다.

박지훈 디지털뉴스부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