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존재

입력 2025-02-12 00:35

'날씬하지 않은 대문호 없다'
거창한 다이어트 결국 실패
그래도 삶은 나를 사랑하는 것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둘의 공통점은 뭘까. 러시아 대문호? 맞긴 하나, 원하는 답은 아니다. 그럼, 이들까지 더하면? 찰스 디킨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알드 달. 영국 작가? 맞긴 하나, 역시 원하는 답은 아니다(게다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 아닌가). 대머리 소설가라고? 아니, 이 고상한 지면에 그런 유치한 질문을 낼 리 없잖은가. 자, 마지막이다. 막심 고리키, 안톤 체호프, 조지 오웰, 알베르 카뮈. 지금껏 언급한 모든 이의 공통점은? 나보다 책을 많이 팔았다고? 거, 너무한 거 아니요? 이 역시 맞긴 하나, 원하는 답은 아니다.

못 맞힐 것 같아 풀 죽은 채로 답을 공개하자면, 언급한 작가 중 날씬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 대문호가 되기 위해 날씬해야 한다는 필요조건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대문호는 모두 날씬한 것이다.

나는 데뷔한 2010년에 서점 한 귀퉁이에서 세계문학 전집을 모두 훑어보고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등단과 함께 마라톤에 입문했고, 풀코스를 완주한 후 생애 가장 가벼운 체중을 달성했다. 이후에도 식사량을 조절하고, 꾸준히 뛰며 체중을 유지했다. 하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작품을 발표할수록 내 소설에 관한 악평은 쌓여만 갔다. 그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과 과음으로 결국 내 체중은 악평보다 더 불어났다. 이에, 작년에는 데뷔 당시보다 무려 10㎏이나 찌고 말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침 5㎏ 감량에 성공한 아내는 우아하게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내가 한 다이어트, 한번 해볼래?”

아내가 부부싸움을 하면 절대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는 끈기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간과했다(자기가 잘못했는데도 말이다). 아내는 단군신화 속 곰이 마늘만 먹었듯, 다이어트를 시작한 첫 사흘간 단백질 셰이크만 먹고 버텼다. 따라서 비록 부부싸움에서 이긴 적은 없으나, 집념의 작가답게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나 또한 단백질 셰이크만 마셨다.

첫날은 버틸 만했다. 지난 15년간 내 몸에 비축된 온갖 지방들이 분해되며 에너지원으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틀째는 생각보다 신진대사가 빨리 됐는지, 유년기에 섭취한 지방까지 분해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사흘째는 ‘태아 시절 영양분까지 모두 소모하는 거 아니야?’라는 위구심마저 엄습했다.

하나, 나흘째 되니 몸이 가벼워졌다. 우려와 달리 내 몸에는 사흘쯤 단백질 음료로만 버티기 충분한 지방이 축적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양배추와 삶은 고기로 첫 식사를 했다. 이때 깨달았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의외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리고 또 하나, 알고 보니 양배추는 엄청나게 단 음식이었다. 그동안 자극적인 음식에 시달려 상실한 미각을 되찾은 터였다. 마치 밀폐된 차 안에서 열 살짜리 아들이 뀐 방귀 냄새만 맡다가, 창을 열었을 때 신선한 공기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새삼 깨달았을 때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서, 다이어트에는 성공했느냐고?

아니, 닷새째 되는 날 가족이 나만 빼고 치킨과 골뱅이 소면을 먹으러 간다고 해서 잽싸게 따라갔다. 그 순간 눈앞에 무수한 마른 대문호들이 스쳐 갔다. 하지만 풍채 좋은 ‘발자크’도 떠올랐다. 아, 헤밍웨이도 있었지!

어쨌든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해 주기로 했다. 고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니까. 나를 위로해 줄 첫 존재는 나 자신이니까. 그리고 날씬한 작가들 사이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보다는, 육중한 몸으로 개성 있게 한 자리 차지하기로 했는데, 아아, 이미 거기엔 발자크가 있다. 헤밍웨이도 있다.

이렇듯 삶에는 쉬운 게 없다, 다이어트처럼. 그리고 부부싸움 후에 아내처럼, 사과하지 않은 채 버텨내는 것처럼(여보, 설거지하고 손들고 있을게요. 생계형 작가인데 소재가 떨어졌어요).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