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의 설상을 가르며 6차례나 공중회전을 돌았다. 몸을 지탱할 장비는 두 손에 쥔 스키 폴이 전부. 자칫 삐끗하면 눈밭으로 추락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스무 살 국가대표 이승훈(한국체대)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착지도 완벽했다. 최종 점수는 97.5. 한국 프리스키 종목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승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현직 소방관이다. 찰나의 주저함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건 설상이나 화재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위험이 워낙 익숙한 가족이긴 하지만 아들의 경기 모습을 지켜보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어머니 유해진씨는 곧 하얼빈 설상에 오를 아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며 부상 위험이 아들을 피해가길 간절히 빌었다.
유씨는 1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경기 전날 부상을 당했다고 코치진에서 다급히 연락이 와서 ‘대회를 못 뛸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마인드 컨트롤을 잘해냈다”며 “본 경기는 보지도 못했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못 본다”고 웃었다.
2005년생 이승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리스키를 시작했다. 당시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어 유명한 관현악단에서도 활동했던 그는 스키를 타고부터는 활을 내려놓았다. 엘리트 선수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키에 입문했지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약 2년 만에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약관에 한국 프리스키계의 ‘선구자’가 됐다.
이승훈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은 운동신경뿐만이 아니다. 약 30초 안에 고난도 기술을 선보여야 하는 프리스키 종목에선 순간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순간의 중요성’은 이승훈이 가정에서 자연히 체득한 가르침 중 하나다. 유씨는 “화재 현장이든 설상이든 순간의 판단이 미치는 여파가 참 크다”며 “그래서 아들에게도 ‘이 순간에 뭘 해야 가장 후회가 덜 남는지 생각하라’고 말해주곤 한다”고 전했다.
이승훈의 지도자 김진해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역시 “승훈이가 부모의 투철한 정신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하얼빈이 날씨가 무척 추운 만큼 추운 날 일부러 옷을 가볍게 입고 호흡법을 익히기도 했다. 다치면서까지 혼자 기술 개발을 많이 해왔다”고 전했다.
벌써 한국 스키 종목 역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시작에 불과하다. 부상 관리만 제대로 한다면 설상 종목 강국들이 즐비한 내년 올림픽 무대에서도 메달권을 기대할 만하다. 김 교수는 “이번 대회에서도 자신의 최고 기술을 선보이지도 않았는데 금메달을 땄다”며 “아시아엔 적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