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DNA 물려받은 이승훈… “亞, 적수 없다”

입력 2025-02-11 02:02
이승훈이 지난 8일 중국 하얼빈 야부리 스키리조트에서 열린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프리스키 하프파이프 경기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고 있다. AP뉴시스

보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의 설상을 가르며 6차례나 공중회전을 돌았다. 몸을 지탱할 장비는 두 손에 쥔 스키 폴이 전부. 자칫 삐끗하면 눈밭으로 추락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스무 살 국가대표 이승훈(한국체대)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착지도 완벽했다. 최종 점수는 97.5. 한국 프리스키 종목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승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현직 소방관이다. 찰나의 주저함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건 설상이나 화재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위험이 워낙 익숙한 가족이긴 하지만 아들의 경기 모습을 지켜보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어머니 유해진씨는 곧 하얼빈 설상에 오를 아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며 부상 위험이 아들을 피해가길 간절히 빌었다.

유씨는 1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경기 전날 부상을 당했다고 코치진에서 다급히 연락이 와서 ‘대회를 못 뛸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마인드 컨트롤을 잘해냈다”며 “본 경기는 보지도 못했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못 본다”고 웃었다.

이승훈이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 훈련 도중 눈부상을 당해 안대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2005년생 이승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리스키를 시작했다. 당시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어 유명한 관현악단에서도 활동했던 그는 스키를 타고부터는 활을 내려놓았다. 엘리트 선수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키에 입문했지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약 2년 만에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약관에 한국 프리스키계의 ‘선구자’가 됐다.

이승훈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은 운동신경뿐만이 아니다. 약 30초 안에 고난도 기술을 선보여야 하는 프리스키 종목에선 순간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순간의 중요성’은 이승훈이 가정에서 자연히 체득한 가르침 중 하나다. 유씨는 “화재 현장이든 설상이든 순간의 판단이 미치는 여파가 참 크다”며 “그래서 아들에게도 ‘이 순간에 뭘 해야 가장 후회가 덜 남는지 생각하라’고 말해주곤 한다”고 전했다.

이승훈의 지도자 김진해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역시 “승훈이가 부모의 투철한 정신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하얼빈이 날씨가 무척 추운 만큼 추운 날 일부러 옷을 가볍게 입고 호흡법을 익히기도 했다. 다치면서까지 혼자 기술 개발을 많이 해왔다”고 전했다.

벌써 한국 스키 종목 역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시작에 불과하다. 부상 관리만 제대로 한다면 설상 종목 강국들이 즐비한 내년 올림픽 무대에서도 메달권을 기대할 만하다. 김 교수는 “이번 대회에서도 자신의 최고 기술을 선보이지도 않았는데 금메달을 땄다”며 “아시아엔 적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