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는지, 미친 척 하는지 공포감 앞세운 협상가 트럼프
낯 뜨거운 찬사로 추켜세워 관세·방위비 압박 피한 시게루
탄핵 사태에 이도 저도 못해도 거래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낯 뜨거운 찬사로 추켜세워 관세·방위비 압박 피한 시게루
탄핵 사태에 이도 저도 못해도 거래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갈등과 협력을 모델링하는 ‘게임 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토머스 셸링은 매우 특별한 상황에선 미친 짓이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매드맨(madman) 전략은 실제로 미쳤는지 일부러 미친 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탓에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줘 협상의 주도권을 갖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하게 해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는 게 핵심이다. 자신이 어떠한 위험한 행동도 벌일 수 있다는 강압적 메시지를 전달해 상대방의 판단을 조작하기도 한다.
이 전략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종식을 위해 소련을 상대로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 데서 기인한다. 이는 당시 꽤 유용한 협상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트럼프 2기 출범과 함께 매드맨 전략이 다시 등장했다. 어느 분야까지 확산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시작점은 관세다. 멕시코와 캐나다를 상대로 한 25% 관세 부과는 비록 시행 몇 시간 전 유예됐지만 이것이 실행되고 상대국이 보복관세로 대응했다면 1930년대 대공황기 관세전쟁이 재연됐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결국 멕시코와 캐나다가 마약의 미국 유입 차단을 위한 국경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조치는 보류됐다. 트럼프의 협상 방식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트럼프 관세의 타깃은 미국의 3대 무역국인 멕시코, 캐나다, 중국이다. 2000조원이 넘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게 그의 구상이다. 이웃 나라와의 협상이 끝나면 다음엔 한국을 포함한 대미 수출국이 타깃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이미 여러 나라를 상대로 상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고,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 부과도 발표했다. 보편 관세, 품목별 관세, 상호 관세 등 전방위 관세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관세에 대한 그의 집착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는 1987년 일간지 여러 곳에 낸 광고에서 “동맹들이 미국의 보호 아래 무역흑자를 내는 부유한 국가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들 국가에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미국에 편입하고, 파나마운하 운영권도 탈환하며, 가자지구를 점령하겠다고 하는 등 노골적인 팽창 야욕도 드러내고 있다.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일단 질러놓고 보는 특유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문제는 트럼프의 폭탄 발언이 일회성이자 즉흥적인 발언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것일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는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국가가 돼야 한다”고 했다. 2017년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담당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트럼프가 너무 미쳐서 당장이라도 손을 뗄 수 있다고 그들(한국)에게 말하라”고 지시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정적’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오모테나시’(손님을 환대하는 일본 특유의 관습) 전략을 그대로 구사해 트럼프의 마음을 얻었다. 자신의 지론을 고수하지 않고 아베 방식으로 트럼프를 추켜세웠고 이게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아베의 금색 골프채 선물에서 착안해 금색 투구를 선물했고 아베의 통역사도 대동했다. 지난해 총격에서 살아남은 트럼프 사진을 들고 “트럼프는 그때 ‘내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게 틀림없다”고 한 부분은 압권이다. 이런 낯뜨거운 찬사와 함께 일본의 공헌을 적극적으로 부각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부과, 방위비 증액 압박을 피했다.
문제는 한국이다. 트럼프는 한국의 방위비분담금 인상과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끌어내기 위해 관세 위협 등을 고리로 한 압박을 예고한 상태다.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반도체, 배터리, 조선, 군수 등 전략 산업에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 북핵 문제 역시 매머드급 난제다.
일본은 매드맨에 오모테나시로 대응해 일단 한숨을 돌렸다. 우리는 탄핵 사태에 묻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매드맨식 밀어붙이기에 대응할 치밀한 전략을 수립할 주체도 어정쩡하다. 카운터파트 부재 탓인지 트럼프가 아직까지 한국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다행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거래의 시간은 시한폭탄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