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열심히 목회하는 후배 목사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다. 목회 중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은혜를 체험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렇게 은혜 충만한 모습으로 교회에 돌아와서는 교인들을 참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고 오면 왜 은혜받지 못하고 사는 교인들의 모습만 보이는지, 그래서 그들을 닦달하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 기도를 많이 사모했던 우리네 예전 신앙이 생각난다. 기도원에서 내려오면 으레 걸걸한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고, 작은 일에도 “아멘”이라는 추임새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은혜받았다’는 가정과 교회가 그렇게 은혜롭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내가 받은 은혜로 인해 타인에게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데, 은혜롭지 못한 타인의 단점을 보고 왜 그리 지적을 했을까. 왜 은혜받은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에 갈등이 생겼을까.
‘진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왜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은혜롭지 못한 표현이지만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 ‘은혜의 통로’가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타인을 정죄하면 ‘은혜의 걸림돌’이 된다.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새해를 맞아 한 주간 특별집회를 하며 교인들에게 시편 119편을 필사하는 미션을 주었는데, 중요한 것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쓰는 것이다.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고, 실수하면 다시 쓰도록 했다. 집회에 빠지지 않고 매일 참석하는 교인을 위한 큰 상품도 준비했다. 마지막 날, 모든 미션을 완수한 교인에게만 상품을 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주라’는 마음을 주셨다.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자 모두가 기뻐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성경을 필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서운해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먼저 들어와 일했던 사람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 말이다.”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 성찰이 없으면, 타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은혜는 끝나고 바닥을 드러낸다. 은혜받은 자가 자기 성찰을 시작하면 점점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깊은 죄를 보게 되고, 자기 죄까지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때문이다. 진짜 은혜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게 만들고 겸손으로 인도한다. 은혜받은 우리의 눈에 자꾸 다른 사람의 행위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면, 진짜 은혜가 아니라 율법적 인간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혜의 기대치’가 있어야 하는데, ‘행위의 기대치’를 적용하니 문제가 된다. 은혜받은 자의 행위는 ‘보상’이 아닌 ‘결과’인데 말이다.
벌써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촛불 정국’이 있었다.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상대방과 자신을 향한 판단의 기대치는 낮추고 은혜의 기대치는 높이자.” 그렇게 우리가 외쳤던 ‘정의’와 ‘정죄’가 깨끗한 세상과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보다 서로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점점 더 높이 타오르게 했다. 교회가 교회를, 교인이 교인을 향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촛불을 들어야 하는지, 태극기를 들어야 하는지, 성경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내 손에 든 것과 다르면 일단 비난한다. “목사님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라를 위한 기도와 기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인지, 누구를 정죄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만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