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호구와 진상

입력 2025-02-12 00:3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 뵙고, 올해 또 뵙네요. 벌써 2년째 뵙고 있네요.” 웃을 일이 없는 요즈음, 일부러라도 한번 웃으시라고 조정실에서 너스레를 떨어본다. 찌푸렸던 소송 당사자들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친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정초부터 법원에 오시려니 마음이 많이 무거우셨지요? 오늘 잘 합의하고, 남은 한 해 편안하셨으면 좋겠네요”라고 얼른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지만 여러 해 묵은 사건들은 계속 밀려든다. 이렇게 억지로 웃겨서라도 얽히고설킨 마음의 실타래가 풀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각양각색의 소송 사건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향해 ‘저 사람은 내가 호구인 줄 안다’거나 ‘저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다니 정말 진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호구가 진상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이는 ‘상대방을 배려해서 양보했더니, 상대방은 나의 배려를 자신의 권리로 알고 주장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호구가 되고 싶지 않고, 아무 근거도 없이 떼만 쓰는 진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민사소송에서 호구나 진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모든 금전적 거래는 문서로 남겨둘 것을 권한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나, 때로는 핏줄보다 가까운 친구, 이웃 간에는 돈거래가 있더라도 굳이 차용증을 남겨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종교공동체 안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차용증을 써달라고 하면 자기를 못 믿어서 그러나 기분 나빠할까봐 선뜻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경우 대개 민사소송에서 상대방에게 빌린 돈을 달라고 청구를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패소하기 십상이다. 그러면 호구가 진상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빌려준 돈을 못 받아 호구가 된 것도 억울한데, 욱하는 마음에 법정에서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싸우려 들다가는 그만 진상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매매계약, 임대차계약, 물품거래계약, 공사계약 등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대방과 계약 서식에 적혀 있지 않은 특별한 약속을 한다면 이를 ‘특약사항’으로 적어 놓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인테리어 공사 계약을 하면서 일부 자재는 서비스로 무상 공급받기로 했다거나, 땅을 매수하면서 경계를 정확히 하려고 측량하기로 했는데 측량비용은 매도인이 부담하기로 했다거나 하는 경우 등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이야기해 덥석 말만 믿고 계약했는데, 막상 소송에 가면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하기 일쑤다. 그러면 사람들은 법정에 와서 “어떻게 저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냐”며 분통해한다. 하지만 어쩌면 상대방은 형편이 되면 해주겠다는 뜻이었는데, ‘형편이 되면’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의 금전적인 거래는 모두 문서화하고, 약속한 내용은 모두 적어 상대방의 서명을 받고, 서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도 녹음해 둘 것을 권장한다. 너무 야박하지 않으냐고? 호구가 돼도 괜찮다면 물론 하지 않아도 좋다. 판사들은 기본적으로 원고도 피고도 증인도 다 거짓말을 한다는 전제하에 재판을 한다고 한다. 법정에서 “저 사람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판사들이 알아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 오히려 다행이지 않은가. 오로지 문서화된 증거를 가지고 있는 편이 소송에서 훨씬 유리하다. 올해는 진상을 만드는 호구에서 탈출하는 한 해가 돼 보자.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