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뮤지컬로 탄생한 ‘미생’

입력 2025-02-10 02:03
뮤지컬 ‘미생’은 일본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 호리프로가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국 창작진과 함께 만들었다. 영화, 드라마를 오가는 실력파 일본 배우 24명이 출연했다. 호리프로 제공

지난 6일 일본 도쿄 메구로 퍼시먼홀 대극장. 일본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호리프로가 제작한 뮤지컬 ‘미생’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월 10~14일 오사카, 2월 1~2일 나고야를 거쳐 이날 도쿄에서 개막한 ‘미생’(~11일)은 한국 동명 웹툰을 무대화한 것이다. 출연진만 24명이나 되는 대작이다.

뮤지컬 ‘미생’은 극작가 박해림, 작곡가 최종윤, 연출가 오루피나 등 한국 예술가들이 핵심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일본에서 현지 제작사가 한국 콘텐츠를 가지고 한국 창작진과 만든 작품 뮤지컬은 ‘미생’이 처음이다. 이날 1200석의 메구로 퍼시먼홀 대극장은 만석에 가까웠으며 공연 뒤 기립박수가 나오는 등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뮤지컬 ‘미생’을 기획한 호리프로의 이카와 가오루 프로듀서는 “나 같은 직장인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만난 게 ‘미생’이었다”면서 “원작 만화의 주제가 국적이나 세대와 상관없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대화할 때도 굳이 배경을 일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국 창작진과의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뮤지컬 ‘미생’은 원작 웹툰의 방대한 이야기를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단순화했다. 하지만 장그래의 성장이라는 핵심에 충실하면서도 장그래를 믿는 어머니의 사랑, 인턴사원들의 고민, 성차별 속에서 노력하는 여직원의 모습 등도 짧지만 영리하게 녹여냈다. 이 작품은 대사가 많아서 연극적이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음악의 힘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이번 뮤지컬 ‘미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연출이다. 바둑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장그래의 마음을 보여주듯 영상과 래핑을 활용해 무대 위에 바둑판 라인을 보여주는가 하면 천정에서 무대를 실시간으로 비추는 등 참신한 무대공간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사각의 프레임을 활용해 직장인들이 일하는 오피스 빌딩을 다채롭게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최근 일본 공연계에서는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을 넘어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인기있는 한국 콘텐츠를 원작으로 직접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제작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2023년 한국의 동명 드라마와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빈센조’와 연극 ‘기생충’이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올해 ‘미생’에 이어 오는 6월엔 뮤지컬 ‘이태원 클라쓰’가 선보이고, 내년엔 드라마 ‘악의 꽃’이 연극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흐름은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한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본에서만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역수출하거나 중국 등에도 라이선스를 팔 수 있어서다. 이를 위해 일본 공연 제작사들은 한국의 IP 제작사와 앞다퉈 업무 협약을 맺는 한편 한국 창작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카와 프로듀서는 “뮤지컬 ‘미생’에 대해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권의 여러 회사와 협의 중이다. 머지않은 시기에 다양한 나라의 관객과 만나고 싶다”면서 “‘미생’ 다음으로는 기획 단계부터 한국의 제작사와 함께하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루피나 연출가도 “일본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높다. 그래서 최근 한국 작가, 작곡가, 연출가 등 창작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러브콜도 많다”고 덧붙였다.

도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