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면 본전 못하면 비난 화살 항상 ‘오늘도 무사히’ 되뇌어”

입력 2025-02-10 00:02
김병주 KBO 심판위원장이 지난달 22일 서울 강남구 한국야구회관에서 인터뷰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10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그는 “실수를 줄여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최현규 기자

야구팬에게 경기장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선수들은 승패가 주는 압박감과 팬들과 만난다는 설렘이 교차한다. 이런 선수와 관중 사이에 섞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기장에 가는 이들이 있다.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비난의 화살이 날아온다. 각종 기계 장비의 도입으로 권위가 자꾸 줄어든다.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 심판들 얘기다.

올해부터 심판진 수장을 맡은 김병주(57)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은 지난달 22일 서울 강남구 한국야구회관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항상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되뇌며 출근길에 오른다”며 “경기 후 심판들이 모여 그날 나온 실수와 잘못에 대해 복기한 뒤 퇴근한다. 그래야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심판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실수’, ‘잘못’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야구장의 주인공인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낼 수 있게 하고 관중에게 최고의 경기를 선사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몸에 배서였을 것이다. 한편으론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하고, 아웃·세이프, 득점 여부를 가르는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도 느껴졌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 흥행에 매우 놀랐다”며 “심판들도 야구계에 몸담고 있으니 관중이 줄어드는 일이 없도록 실수를 줄여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다른 심판들과 마찬가지로 선수 출신이다. 경남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를 졸업하고 동아대를 거쳐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로 생활을 했다. 선수로선 빛을 보지 못했다. 2년 만에 운동을 접었다. 은퇴 후 고향에서 쉬던 중 심판이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김 위원장은 “모교에 동계 훈련 온 심판들을 봤을 때 멋있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됐고, 올해로 33년째 심판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멋쩍게 웃었다.

93년 입사 뒤 2군 심판만 보던 그는 드디어 94년 7월 22일 전북 전주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쌍방울 레이더스 경기에 3루심으로 나서며 1군 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선수 시절보다 더 긴장했다. 김 위원장은 “첫 경기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며 “당시에도 프로야구 인기가 굉장히 높았고 광적인 응원을 보내는 팬들이 많았다.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5명이 한 조를 이루는 심판진은 처음 경기에 나서는 심판에겐 3루심을 맡긴다. 휴무일 후 경기에 투입될 때도 마찬가지다. 3루에 먼저 서고 이후 1루-2루-주심-대기심 순으로 경기에 들어선다. 김 위원장은 파울 공에 맞기를 밥 먹듯 하고, 가끔 선수나 감독과 언쟁을 벌이면서 지난해까지 통산 2984경기에 출전했다. 매년 100경기 가까이 꾸준히 나서야 가능한 기록이다. 심판위원 출전 기록 역대 2위다. 김 위원장은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심판을 보며 한국 심판의 자존심을 세웠다.


심판 일은 고되다. 야외에서 일하고 출장이 잦다. 현재 KBO 심판은 52명이다. 30명이 1군인 KBO리그를 전담하고 나머지 22명은 2군인 퓨처스리그를 담당한다. 1군의 경우 5명이 한 조를 이루고 나머지 5명은 로테이션을 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10개 구단이 매일 전국 5곳에서 경기를 치른다. 그렇다 보니 시즌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다. 김 위원장은 “1년 내내 바깥에 나가 있어야 하는 직업이고 주말에도 경기가 열리니 아이를 키우는 건 늘 아내 몫이었다”며 “항상 가족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

심판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2019년 도입된 심판강등제도로 인해 일정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심판은 2군으로 내려가고, 2군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인 심판은 1군 무대를 밟는다. 허구연 총재 취임 후 오심 줄이기에 사활을 걸면서 심판들의 경쟁력이 올라갔다. 반대로 경기, 출장, 시험, 평가 등 업무 부담은 늘었다. KBO는 올해 2명 정도의 심판을 새로 채용해 심판들의 부담을 다소나마 덜어줄 예정이다.

한때 심판은 그라운드에서 절대자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위를 위협한 것은 선수나 감독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이었다. 기계 장비의 도입으로 심판의 위상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고속 카메라 등 방송 장비의 진화, 비디오판독 도입에 더해 지난 시즌 한국이 세계 최초로 자동 투구판정시스템(ABS·Automatic Ball-Strike System)을 도입하면서 심판의 권위가 약해졌다. ABS는 카메라와 레이더 등을 이용한 투구 추적 시스템을 이용해 스트라이크와 볼을 자동으로 판정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올해는 투수와 타자의 빠른 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해 피치클락을 정식 도입한다. 퓨처스리그에선 체크 스윙 판독 전용 카메라를 설치해 시범 운용한다. KBO리그엔 내년쯤 도입 예정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기계 장비에 심판들은 정신이 없지만, 변화에 순응하고 있다. 기계 덕에 황당한 오심과 편파 판정 논란도 상당 부분 해소됐다. 김 위원장은 “권위도 남들이 인정을 해줘야 세워지는 것이다. 미국, 일본도 한국에 와서 ABS 시스템을 배우고 갔다.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며 “젊은 관중들이 가장 원하는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했다.

심판은 선수·감독과 불가근불가원 관계다. 모두 선수 출신인 심판들은 선수나 코치·감독들과 알게 모르게 엮여 있고, 선수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경기 중 일체의 사적인 대화는 금지일뿐더러 밖에서 만나는 일도 거의 없다. 점수 하나, 아웃카운트 한 개로 승부가 갈리는 야구의 세계에서 심판의 사심이 일절 반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김 위원장은 “선수들이 판정에 의문이 있을 때 대답을 해주기는 해도 사적인 대화는 아예 안 한다. 직업상 남들의 오해를 사는 것이 싫어서 사석에서 만나는 것도 조심한다”고 했다.

5㎏에 달하는 심판 장비를 입고 한여름이나 포스트시즌같이 중요한 경기를 할 때면 2~3㎏이 쉽게 빠진다. 그럼에도 33년을 이어온 심판 일이 이제는 천직으로 여겨진다. 여전히 야구장 가는 길은 무겁고 그라운드 위에선 중압감이 심해도 막상 심판석에 서서 “플레이 볼”을 외칠 땐 팬들의 함성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이런 김 위원장도 응원하고 좋아하는 팀이 있을까. 아무래도 마산(현 창원시) 출신이다 보니 NC 다이노스를 좋아하느냐고 슬쩍 찔러봤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응원하는 팀은 없고, 좋아하는 팀은 딱 하나 있어요. 경기 빨리 끝내는 팀이 최고예요. 투수는 빨리 던지고 타자는 빨리 치고 감독은 작전 적게 내고요, 또 선수 교체도 별로 안 하는 팀이 경기 빨리 끝내서 좋지요. 하하.”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