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군에 있는 고금고등학교의 지난해 신입생은 9명이다. 올해는 11명이 입학할 예정이었는데 최근 1명이 도시로 떠났다. 지역을 떠나는 학생이 늘면 신입생 수는 다시 한 자릿수가 될 예정이다. 1969년 설립된 이 학교는 7~8년 전만 해도 20명 넘는 신입생을 받았다. 전교생은 지난해 기준 50명. 한 자릿수 신입생이 이어지면 전교생은 30명 밑으로 줄어든다. 교원(11명) 1명당 3명꼴이다.
56년 역사를 지닌 고금고의 ‘폐교 시간표’는 초읽기에 들어섰다. 지역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학년당 학생 수는 6명까지 떨어졌다. 진학 시기에 맞춰 도시로 떠나는 학생을 감안하면 고금고의 운영은 ‘향후 3년’이 마지노선이라는 게 이 학교 사회교사 정선렬(38)씨의 설명이다.
정씨는 최근 이런 현실을 담은 저서 ‘축소사회 대한민국’을 냈다. 지방 소멸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임에도 수도권에선 제대로 된 위기의식을 여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점이 계기였다고 한다. 정씨는 통화에서 “인구 대다수가 사는 수도권과 달리 지방에서는 사회 소멸이 이미 ‘주어진 미래’가 된 지 오래”라며 “수도권도 인구 감소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의 모습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지방 소멸이 우리 앞에 주어진 미래임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땅한 해법이 없어 외면하고 싶은 주제에 더 가깝다. 수도권과 지방이 운명공동체인 걸 알면서도 기업과 자본, 인재가 수도권으로 몰리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답을 제시하는 사람도, 뭐라도 해보자며 앞장서는 사람도 없다. 저출산·고령화 추세와 함께 ‘이러면 안 된다’ 수준의 담론만 이어질 뿐이다.
이렇게 주어진 미래를 알면서도 손 놓고 있는 난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수년간 중국산 제품이 국내 산업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지만 정부와 기업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만난 정부 관계자와 기업 인사들에게서 “향후 수년 안에 한국인 다수가 중국산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중국산 스마트폰을 쓰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중국의 공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중국 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넘어 품질까지 갖추고 있다며 중국의 점유율 확대는 정해진 수순이란 진단만 오갈 뿐이었다.
한국 사회나 경제가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고 시대 흐름에 앞서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도 희미하다.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 간 대국이 펼쳐진 2016년에 정부는 ‘지능정보산업 발전전략’을 발표하고 AI 육성을 표방했다. 이듬해에도 ‘AI 국가전략 프로젝트 추진’ 등 AI 확산 정책을 내놨고, 지금도 ‘AI 3대 강국 진입’ 등의 표어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8년 사이에 한국이 얼마나 글로벌 AI 흐름을 쫓아갔는지는 의문이다. 반대로 혁신이 기존 산업이나 규제에 밀려 좌초한 사례는 너무나 많아 고르기도 어렵다. 직역 갈등과 불법 논란에 부닥쳐 모빌리티, 법률, 세무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이 사장되거나 존폐 위기에 놓였다. 렌터카 차량 호출 서비스인 타다는 불법 콜택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 기소됐고, 4년 만에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국회의 ‘타다 금지법’ 제정으로 재기 자체가 막혀 버렸다.
앞서 2000년대 정보기술(IT) 열풍에서 네이버, 넥슨 등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 열풍 속에 카카오가 탄생했지만 그 뒤를 잇는 후발주자는 찾기 어렵다.
이런 경험 탓인지 향후 AI나 자율주행 같은 신산업에서 이런 수준의 기업들이 새로 탄생할 거란 기대감은 많지 않다. 최근 ‘딥시크 쇼크’에서 우리도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분위기보다 이제는 정말 끝났다는 무기력함이 더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근 저출생·고령화와 지방 소멸, 산업 경쟁력 약화 등 산발적으로 다뤄지던 우려들은 하나로 뭉쳐 ‘피크 코리아’라는 표현으로 등장했다.
말 그대로 한국 사회와 경제가 정점을 찍고 내려올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갖가지 난제에 손을 놓고 있던 시간만큼 두꺼워진 청구서가 날아올 시기도 다가오고 있다. 타다 대표는 무죄 선고 이후 “변화와 혁신의 시간은 아무리 멈추려 해도 온다”고 했다. 우리 앞에 놓인 ‘주어진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