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착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지 않나요?”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세상살이의 연차가 높아질수록 “세상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마음이 된다. 칸트는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상태를 ‘최고선’이라 칭한다.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한 것이 최고선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최고선은 우연적으로만 가능해지지 필연적으로 가능해지지는 않는다. 즉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도덕적인 행동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도덕과 행복은 개념적으로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 말은 매우 냉정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최고선이 실현되기를 바라니 말이다.
착한 사람이 잘 사는 게 항상 보장된다면 착하게 살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착하다’고 칭해지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떨어진다. 그 행위는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행위’가 돼 버리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행위할 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누가 도덕적 행위를 마다하겠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에서 도덕적 가치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칸트는 옳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도덕적 가치가 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함에도 그 행위가 옳기 때문에 할 때 우리는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이익을 포기하고 옳음을 선택할 때 도덕적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도덕은 도덕이고 행복은 행복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했을 때 행복할 수 있기까지 하면 좋겠지만 애초에 도덕적 행위는 행복하자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품격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인 것이다. 도덕적 행위를 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행복해질 수는 있지만 이는 어쩌다 우연적으로 가능해질 뿐이다. 칸트는 도덕과 이익은 무관한 것임을 정교한 논리로 보여줬다. 결국 칸트의 주장은 인간은 선을 행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면 되는 것이고 선의 결과가 본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상관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 된다. 칸트 입장을 밀고 나가자면 “착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지 않나요?”라는 의문은 도덕적 가치도 얻고 현실적 이익도 얻고 싶다는, 양 손에 떡을 쥐겠다는 소리가 된다.
칸트는 최고선은 신이 개입할 때나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신이 개입해 조정해준다면 혹시 최고선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최고선이 실현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소리가 되겠다. “잘 살 수 없다면 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면 그 사람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도덕적이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인간의 품격을 느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역시 비도덕적인 행동을 통해 얻는 이익이나 행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양심이 밥 먹여주나?”라는 말을 한참 할 때가 있었다. 이제는 이 말이 그나마 양심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은 이 말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안의 무언가가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