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이 문득 던진 질문이 마음에 남았다. “요즘 사람들 얼굴이 예전 같지가 않아….” 거리마다 거칠고 굳은 표정들이 가득하다. 광장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은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패와 창이 됐다. TV와 SNS 속에서도 분노와 불신이 쌓여간다. 계엄과 탄핵 정국이 몰고 온 정치적 혼란,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한국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고, 경직되고, 결국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를 겨냥하고 있는가.
1972년 6월 베트남전쟁 중 네이팜탄 공격을 받은 마을에서 한 소녀가 온몸이 불에 그을린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그 순간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불타는 마을보다 더 강렬하게 전쟁의 참상을 폭로했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조차 이기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할 수 없었다. 얼굴 하나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서로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편견과 오해로 왜곡된 형상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얼굴을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신비한 창이라고 봤다. 성경도 형제와 이웃 사랑의 실패를 얼굴의 언어로 표현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고,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을 두려워했다. 타자의 얼굴은 관계의 거울이며 우리 존재가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묻는 신적 질문이다.
야곱의 이야기는 얼굴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에서의 분노에 쫓겨 하란으로 도망친 그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얼굴을 지운 채 살아야 했다. 라반은 시간이 흐르면서 본색을 드러내며 야곱을 기만했다. 야곱은 삼촌의 얼굴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속이는 자와 속임을 당하는 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와 가면이 벗겨지는 자. 야곱은 형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밤새 씨름한다. 자신의 과거와의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꿔주셨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는 더 이상 도망치는 얼굴이 아니라 마주하는 얼굴이 됐다. 그리고 형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얼굴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얼굴은 관계의 공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거룩한 자리다. 누군가의 얼굴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자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야곱이 그랬듯 진정한 화해와 회복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얼굴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 얼굴을 이용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는 신비로운 거울로 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얼굴에서 ‘사람의 얼굴’을 회복하는 일이다. 신념이라는 깃발, 아니 실은 욕망이라는 마스크를 벗고, 서로의 인간다운 얼굴을 진실로 마주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동족의 얼굴에서 형제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고 적대감과 증오로 왜곡된 형상만 선명해지는 극단적 갈등 속에서 한국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웃의 얼굴을 통해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 아닐까. 적어도 주일 하루만이라도 편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서로의 참된 얼굴을 마주하며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