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내가 누구요?”

입력 2025-02-07 00:32

치매 아버지 문득 던진 질문
존재 의미 찾는 절박함 느껴
기억은 가족과 공유하는 것

중증 치매로 접어들면서 아버지는 정말로 많은 기억을 잃으셨다. 지난여름 끝이 보이지 않은 심한 더위에 체력이 고갈된 아버지는 말도 잃어버리셨다. 거의 온종일 침묵 속에 계시다가 아주 기본적인 단어 한 마디를 겨우 내뱉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짧게 보면 병의 증상이 어제보다, 지난주보다, 한 달 전보다 나아지기도 한다. 선선해진 가을 날씨 덕분에 아버지는 입맛을 되찾으셨고, 겨울이 되니 체력도 나아지셨다.

그 때문인지 기억력이 회복된 것이 아닌데도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확연히 늘어나셨다. 지난 한두 주간 아버지의 다시 터진 말 덕분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오늘 하신 새로운 말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돌 지난 아기의 옹알이처럼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아버지가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 맞은편에 앉은 나의 남편을 오래 응시하시다가 어렵게 말을 거셨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본 완성된 문장이었다. “내가 누구요? 내가 뭐하는 사람이요?” 혹자는 이 말을 듣고 자기가 누군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의 증상에 대해 이보다 몹쓸 병은 없을 것이라 슬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몇 달 동안 말없이 지내시던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말이 터져 나왔을 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산 자’의 존엄을 느꼈다. 인류 지성사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 응답이거나 그 응답을 전제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이해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사위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철학자들보다 더 절박한 자기 존재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자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자주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가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양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답답해하곤 하셨다. 이제야 나는 그 행동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이자 보편적인 두려움인 게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드리며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씀해 드렸다. 아버지가 평생 목회하던 목사이셨고, 우리 모두의 좋은 아버지이셨다고도 했다. 나는 그 순간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또 “제자인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겹쳤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로 오인하는 것처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비참한 ‘치매 환자’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에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 자리에서 함께 고백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능력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기억도 능력이 되었고, 기억력의 수준에 따라 인간 존재를 위계 짓는 풍토가 알게 모르게 깊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존재조차 잃어버린 ‘치매’ 환자야말로 가장 불행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 본연의 가치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히 한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관계적 존재이자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기억은 자기 혼자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우리 가족이, 그와 함께 삶을 나누던 이들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온전히 답하는 일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능력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정말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