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입춘방을 붙이며

입력 2025-02-07 00:45

엊그제가 입춘이었다. 입춘이라는 절기가 무색하게, 예년 기온을 밑도는 추위가 찾아왔다. 천변에 왜가리도 날개 깊숙이 부리를 묻었고, 투명한 비닐을 구겼다 편 것처럼 살얼음이 깔렸다.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고 산책을 나선다. 공기 중에 옅게 알코올 냄새가 날 것 같은 맵찬 추위다. 정신이 번쩍 든다. 정끝별 시인의 산문집 ‘시 쓰기 딱 좋은 날’(난다·2024)은 이런 날씨에 펼치기 좋은 책이다. 시인도 산책하다 보았을까. 얼음덩어리를 발목에 붙이고 비틀거리는 두루미를 떠올린다. 두루미는 체온을 유지하려고 한쪽 다리만 물에 담근다, 발목에 붙은 얼음덩어리는 그런 습성으로 얼어붙은 것일 테다. 시인은 이를 빗대어 “시라는 강물에 발을 담근 지 오래라면 오래”라며, 지난날을 톺아본다.

띠지에 적힌 ‘고로쇠 한 철’이라는 시도 찾아 읽는다. “내 눈에 네가 들 때처럼// 눈이 쌓인다/ 겹겹의 눈에 밤이 쌓인다// 눈송이가 제 몸 녹여 나뭇가지를 적시고/ 나뭇가지가 제 몸 얼려 눈송이를 떠받칠 때// 아름다운 문장 하나가/ 흰 수정 테이프 아래 감춰졌다// 감춰진 눈송이와의 겨울 이야기는/ 봄이 되면 수액으로 새어날 것이다.” ‘흰 수정 테이프’라는 단어 앞에서 문득 멈춘다. 크고 작은 두 개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며, 공책에 하얀 눈길을 내던 수정테이프. 이렇게 작은 사물 하나를 두고도 시인은 계절의 은미한 기척을 발견한다. 덧대서 문지르면 마치 층층이 눈더미를 쌓은 듯한 길. 그 아래 숨은 아름다운 문장을 따라 눈송이에서 나뭇가지로, 나뭇가지에서 봄이 움트는 땅속으로 촉촉한 물길을 낸다.

입춘을 맞이해 나만의 방식으로 문장을 바꿔 입춘방을 써본다. ‘입춘대길 중쇄출래(立春大吉 重刷出來).’ 입춘을 맞이해 크게 길하며, 중쇄를 찍자! 봄이 더디 온다고 아쉬워 말자. 삭풍이 불면 어떠랴. 막바지 겨울을 나는 고로쇠나무 속에는 이미 새봄의 명랑한 입김이 붐빈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