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3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이자 아홉 번째 작품이다. 누네즈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 소설 ‘어떻게 지내요’를 썼고, 2018년에는 소설 ‘친구’로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소설은 ‘불확실한 봄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인칭 화자인 주인공 소설가가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 문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의 서두에서 가져온 것이다. 플롯이 아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인 많은 부분은 울프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굳이 플롯을 추려내자면 이렇다.
그해 봄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쳤던 2020년 봄. 미국 뉴욕에 사는 주인공은 “한동안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건 그해 봄의 많은 불확실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봉쇄 조치로 인적이 사라진 뉴욕 맨해튼의 공원을 날마다 배회하며 꽃을 보고 불안과 고독을 달랜다. 어느 날 지인의 부탁을 받고 고급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금강앵무 ‘유레카’를 맡는다. 집주인은 여행을 갔다 코로나로 발이 묶여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다. 유레카를 돌봐주던 대학생마저 갑자기 떠나 버려 이틀 이상 방치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유레카를 돌봐줄 사람이 급히 필요했던 것이다.
앵무새를 키우는 게 평생의 꿈이었던 주인공은 앵무새와 교감하며 활력과 위안을 얻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대학생이 느닷없이 나타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대학생의 이름은 베치. 분노조절 장애를 갖고 있고 인간 혐오주의자다. 나이나 생각이나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베치가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어치우지만, 베치는 주인공을 위해 캐러멜오토밀크아이스크림 네 통을 사온다. 그리고 “실컷 드세요”라는 말에 주인공은 속이 울렁거렸고, “물어보고 사올 걸 그랬네요. 다른 말을 좋아할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한 땐, 눈물이 고였다. 그 후 둘 사이에 조금씩 유대감과 친밀감이 쌓여 갔고, 베치는 그간 쌓여온 상처의 기억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그렇게 불확실하기만 했던 그해 봄의 기억은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은 누네즈의 자서전으로도 읽힐 수 있다. ‘나는 기억한다’로 시작하는 수많은 단락 속에서 첫사랑과 이민자에 대한 편견, 걸스카우트 캠프의 추억이 쌓여있다. ‘나는 기억한다’는 주인공이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인 화가 조 브레이너드의 동명의 자전적 기록을 오마주한 것이다. 주인공은 소설 중반에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컴퓨터로 내 이름(Sigrid Nunez)의 맞춤법 검사를 실행하면 ‘달콤한 명사들(Sugared Nouns)’로 고쳐준다.” 어렴풋이 주인공이 누네즈라고 추측하던 독자에게 내가 바로 누네즈라고 말하는 듯하다.
소설은 시종,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고민의 단상들로 채워져 있다. 때로는 “요즘 보면 작가는 창작 예술가라기보다는 정치인에 더 가까워져 가는 듯하다. 늘 회피적이고, 해석에 집착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에 영국 소설가 그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실제 일어나는 대로 쓰고, 살아라. 삶은 지어내기엔 너무 신성한 것이다”는 권고를 새기기도 한다.
소설의 원제목은 ‘나약한 존재들(the vulnerables)’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하며 가장 희생을 당했던 사람들은 바로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소설가 자신도, 우리 모두도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희망의 빛은 있을까. 작가는 소설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빼어난 글솜씨뿐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크나큰 마음까지 겸비한 사람.” 그렇지, 사람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