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니 사람들이 말린다. 지금은 화해할 때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구별할 때라고. 동의한다. 하지만 진영 세대 계급 지역에 상관없이 언젠가는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밥상에서만큼은 옛 추억을 나누며 같이 웃을 수 있어야 하고 대중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정을 나눴던 그 세상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는 서로의 다름과 차이는 나중 문제였다. 사람이 먼저였고 서로를 향한 신뢰가 우선이었다. 적어도 교회가 그 중간 역할을 해 왔고 다리가 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의지했으며 신뢰했다. 그때 한국교회는 부흥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다. 교회의 세속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처럼 갈라치기를 하고 편을 나누며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됐다.
지금 한국사회는 둘로 나눠진 광장에서 서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외치고 있다. 예수는 ‘화평’이기에 막힌 담을 헐고 둘을 하나 되게 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따라서 지금은 그 어느 쪽에도 예수의 뜻이 임한 곳이 없다. 예수의 영이 함께 하는 곳은 화해와 용서가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고 사랑과 정의가 함께 성취되는 곳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전했다. 여기서 ‘두세 사람’은 소수의 사람이 함께한다는 뜻을 가진 동시에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이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교회는 그렇게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대형화되길 원하지 않으신다.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대단한 구호를 외치기 또한 바라지 않으신다. 대신에 서로 다른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길 원하신다. 그곳에 주의 영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바로 그곳에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다.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사랑과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불가능성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을 논했다. 물론 하늘의 사랑(아가페)은 결코 이 땅 어디에서도 완전히 이뤄질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구현되지 않을 저 하늘의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서 이뤄내고자 겸손히 최선을 다하는 신앙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화해를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사랑은 더욱이 종교적 사치처럼 느껴진다. ‘용서하라’는 말은 너무 값싼 은혜의 표현처럼 들린다.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법원에 폭력을 행사하여 법치를 파괴하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사회적 약속으로 만든 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법치를 세워야 한다. 단지 그 정의가 보복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안에 교회는 제3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의 어두운 때가 지나가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었던 이들과 아이돌 응원봉을 들었던 이들이 다시 함께 어울리고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교회가 돼야 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했다.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의견을 물어본다면 모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때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고 기도했다. 잘못된 길에 빠진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함께할 수 있는 ‘창조적인 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그들도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성숙함대로 법은 법대로, 공의는 공의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풀려 가길 바랄 것이다. 또 때가 되면 ‘화해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한국교회에 기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할 수 있다고 마구 설교하고 마음대로 외치지 말자. 무심코 던지는 돌에 개구리가 죽는 것처럼 함부로 힘을 과시하고 돌을 던지지 말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랑’을 준비하고 가능케 하는 교회가 되자. 교회가 이 땅에 있음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