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케네디가 쓴 ‘원더풀 랜드’, 알렉스 갈런드가 연출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바버라 월터가 쓴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모두 내전을 다룬 미국 소설가, 영화감독, 정치학자의 최근작이다. 미국에서 이런 작품들이 생산된 것에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존재의 영향이 크고, 이들 작품이 한국에 소개돼 관심을 모은 데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탄핵 사태가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국회의사당에 들이닥치는 무장 군인들, 법원을 때려 부수는 폭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내전의 이미지가 아닌가.
소설 ‘원더풀 랜드’에서 미국은 진영 간 충돌을 거듭하다 2036년에 리버럴한 ‘연방공화국’과 기독교 원리주의 ‘공화국연맹’ 두 나라로 분리된다. 미국의 정치 양극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현실을 보면 전혀 극단적인 설정이 아니다. 미국은 이미 2021년 1·6 의사당 폭동 사태로 내전의 ‘전초전’을 보여줬다. 그때의 폭도들은 4년 만에 사면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정치학자 월터도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서 2028년 11월 미국 대선 직후 내전이 발발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에 이은) 두 번째 내전이 일어난다면 전투원들은 들판에서 모이지 않으며 군복을 입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온라인에서 저항 계획을 짜면서 혼돈과 고통을 조성할 것이다. 그러고는 미국인들에게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제목 그대로 미국의 내전 상황을 그린 영화 ‘시빌 워’에서도 한 군인이 주인공 일행에게 “넌 어떤 종류의 미국인이냐”고 묻고 죽일 사람과 살려줄 사람을 결정한다. 월터가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 여성 누르와 인터뷰하며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조국에서 내전이 폭발하기 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자 누르는 슬픈 얼굴로 “사람들이 시아파인지 수니파인지 물어보기 시작했어요”라고 답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편을 가르는 질문이 공개적으로 던져지는 것이 내전의 시작이라는 얘기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났을 때 정치 얘기하기가 겁나는 한국도 이미 심리적 내전 상태, 혹은 내전의 초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사회학’에 실린 한 논문은 한국사회가 개인들의 이념 차이를 넘어 보통 시민들의 집단행동이 일상화된 ‘분쟁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특정 집단의 이름으로 차별을 호소하고 차별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내전을 선동하는 사람을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라 부른다. 월터는 “정체성을 둘러싸고 분열을 부추기는 인물은 정치인만이 아니다. 기업 엘리트, 종교 지도자, 언론인 등 고만고만한 종족 사업가들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을 여럿 꼽을 수 있다.
월터는 특히 내전의 촉매로 소셜미디어를 지목한다. “소셜미디어가 각국에 진출하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얻게 되자 종족 파벌이 늘어나고 사회적 분열이 확대됐고, 협박을 일삼는 포퓰리스트가 당선됐으며 폭력 사태가 늘어났다. 소셜미디어 사업 모델은 자신이 퍼뜨리는 정보가 많은 관심을 끌기만 하면 진실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극우 유튜브 채널을 통해 퍼진 부정선거 음모론의 폐해는 지금 많은 한국인들이 톡톡히 겪고 있다.
월터는 소셜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며 음모론자, 혐오 장사꾼, 민주주의의 적들이 떠들어대는 스피커 소리를 줄이도록 소셜미디어를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세계를 뒤흔드는 트럼프는 소셜미디어 규제가 곧 ‘검열’이라며 반대로 간다. 엄혹하고 심난한 시절이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